현대 세계에서의 교회와 전례
The Church and the Liturgy in the Contemporary World
현대 세계에서 전례와 인간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잠재적으로 복잡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 연구의 두 가지 핵심 주제인 인간과 전례는 모두 단순한 방식으로는 결코 다 설명할 수 없는 풍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전례에 관해 논의할 때 우리는 그 신학적 내용이나 전례가 거행되는 다양한 형식에 관해 질문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전례의 참여자인 인간을 살펴보려 할 때에도 그들의 연령, 사고방식, 신앙의 성숙도(혹은 신앙의 부재)에 나타나는 다양성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이 논문은 현대 문화와 전례 사이의 보다 구체적인 접점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해주는 몇 가지 통찰을 제시하려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 본 연구에서는 현대인이 살아가는 문화적 맥락을 개괄하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일상적인 사목 활동에서 관찰할 수 있는 특정한 사목 방식들의 부적절성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관점은 전례 거행의 본질에 속하는 중요한 특징들을 부각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 가운데 우리는 전례의 내용, 형식, 참여자와 관련된 요소들을 제시할 것이다.
1. 전례 문제의 문화적 배경
The liturgical question’s cultural background
현대인을 이해하고 정확하게 묘사하기 위해서는 현대인의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자율성과 개별성에 주목하고자 한다.¹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 그리고 인간이 지닌 권리와 특권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인간에 관한 논의에서 핵심적인 결정 요인으로 보인다.
이러한 태도의 배경에는 지난 세기의 전체주의로부터 물려받은 이데올로기와 집단적 구원이라는 비전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²
물론 인간의 주체성을 부각한 일이 가져온 긍정적인 성과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이해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A. 르노(A. Renaut)는 우리 문화에서 개인(individual)이라는 개념이 주체(subject)라는 개념보다 점점 더 우세해지며, 주체를 갈수록 지배하고 있다고 정확하게 지적한다.³
이러한 강조점의 이동은 주체,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격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고유한 관계들이 소멸하고 해체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사회는 일종의 원자화(atomization)를 겪게 되었으며, 이제는 점점 더 단일한 의미의 ‘개인주의(individualism)’가 아니라 복수의 ‘개인주의들(individualisms)’을 이야기하게 되었다.⁴
이처럼 개괄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권리와 보장, 계획과 야망을 지닌 고립된 ‘나(I)’가 현대인의 사고방식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분석을 한 걸음 더 발전시키면, 삶을 조직하는 주된 기준이 **자아실현(self-realization)**이라고 말할 수 있다.⁵
자아실현은 신학에서 말하는 ‘구원(salvation)’에 대응하는 일종의 세속적 등가물이 된다.
이처럼 개인과 개인의 자아실현이 가장 중요하거나, 심지어 유일한 준거점이 되는 서사 속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목표를 실현하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함으로써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확인해야 하는 생활양식이 형성된다.⁶
그 결과 삶의 역동성은 유용성과 수익성의 논리로 환원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개인의 삶은 자유시장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며, 이는 소비주의적 태도를 만들어낸다.⁷
이러한 문화에서 시장 활동과 광고의 목적은 **“욕구를 충족할 수단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다.⁸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의 연구자 J. 클래머(J. Clammer)는 쇼핑을 다음과 같이 바라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쇼핑은 모험이자 사파리이며, 카니발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예상치 못한 ‘위험’이 존재한다…….”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 또 누구를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예상치 못한 ‘위험’이 존재한다. 쇼핑은 일종의 자기 발견(self-discovery)이다.”⁹
저자는 여기에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쇼핑은 그 본질상 연극성을 지닌다. 사람들은 외출하기 위해 옷을 차려입고, 새로운 인격적 정체성을 획득하거나 기존의 정체성을 수정하기 위해, 또는 자신이 타인에게 보여지고 알려지는 환경을 완성하기 위해 쇼핑을 한다.”¹⁰
이러한 생각을 요약하자면, 오늘날 쇼핑은 물건을 획득하는 행위라기보다는 새로운 정체성을 구매하는 행위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¹¹
오늘날 소비가 인간 삶의 기본적인 차원 가운데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인간관계 역시 이러한 논리 속으로 편입되고 그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간관계는 흔히 그것이 이익을 가져다주고, 만족감을 제공하며, 자기 자신의 ‘나(I)’가 지닌 욕구를 충족시키는 동안에만 유지된다.
심지어 우리는 인간의 탈인격화(depersonalization)에 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한 인간이 다른 사람의 삶에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유용한 존재이며, 스스로 소비의 대상이 되는 것을 허용하는 동안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덧붙일 필요가 있다. 인간의 사고방식에 스며들어 정체성을 형성하는 이러한 효용성의 논리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적절한 사람을 찾아다니는 잠재적인 ‘고객들’에게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영향은 성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문턱에서 스스로 ‘시장에 진입’하려는 사람들에게도 미친다.
그들은 자신의 재능뿐만 아니라 자신의 꿈까지도 광고하고 성공적으로 판매하려 하며, 더욱 비극적인 것은 종종 자기 자신마저 판매하려 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태도가 인간관계에 경쟁의 정신을, 때로는 적대감까지 침투시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타인이 인생의 여정을 함께하는 동반자라기보다 경쟁자로 여겨지는 세계에서는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 한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점점 더 빈번하게 경험되는 소외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소외는 두려움을 동반한 고독과 더불어 현대 세계의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된다.
자유시장의 사고방식에 따라 살아가는 생활양식이 만들어내는 긴장에서 벗어나는 출구는 오락에 바쳐지는 여가 시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리샤르트 칸토르(Ryszard Kantor)가 지적하듯이, 본래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시간이어야 할 놀이의 시간마저 소비주의의 영역에서는 상업화되어 앞서 설명한 사고방식 속으로 편입된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여가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 소비적 성격을 띠게 되면서, 축제적 향유가 차지하던 자리에 과잉의 현상이 등장하고, 공동체적 유대는 소비를 통해 유지된다.
소비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순간이 놀이로 귀결된다. 쾌락을 제공하고, 다시 말해 그것을 판매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 기관들이 설립된다.
이처럼 오락을 지향하는 소비사회의 쾌락주의가 모습을 드러낸다.¹²
이러한 쾌락과 오락은 인간이 직업 활동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도록 해주지만, 인간 존재의 의미에 관한 질문에는 답할 수 없다.
앞서 묘사한 현대 문화의 맥락에서 이탈리아 연구자 보르기(Borghi)의 진단은 정확하면서도 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시장 메커니즘에 기초하여 사회구조가 형성된 사회에서는 (…) 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오늘날 인간의 욕구는 신보다는 세상에 의해 더욱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충족된다.
결과적으로 **신은 더 이상 경쟁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시장에서 밀려나게 되었다.**¹³
이러한 말은 인간과 신앙의 관계에 관한 질문, 그리고 필연적으로 신앙이 거행되는 장소이자 신앙을 거행하는 수단인 전례와 인간의 관계에 관한 질문의 답을 찾는 데 있어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2. 사람들에게는 어떤 전례가 필요하지 않은가?
What kind of liturgy do the people not need?
앞서 설명한 사고방식은 교회의 사목 활동에서도 낯선 것이 아니다.
교회가 받아들인 관계 형성 방식에 관해 설명하면서, 미국의 학자 존 드레인(John Drane)은 지난 세기 후반에 널리 유행했던 사회학적 진단, 즉 미국 사회의 **‘맥도날드화(McDonaldization)’**에 관한 논의를 언급한다.¹⁴
이러한 과정의 주요 특징은 효율성, 계산 가능성, 예측 가능성, 통제이며, 이 특징들은 교회의 삶과 사목 실천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¹⁵
이와 비슷하게 사목 활동 역시 앞서 언급한 기준들을 활용하면서 상업적인 방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흔히 열정으로 가득 찬 이러한 활동을 통해 교회가 인간의 욕구를 둘러싼 시장에 진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목 단체에 속한 사람들의 수나 단순히 전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로 측정되는 성공까지 거둘 수 있도록 하는 전략들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사목 활동의 책임자들은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고, 광고 문구를 고안하며, 다양한 새로운 기획과 종교적 이벤트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들은…
…잠재적인 고객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모든 활동은 인간의 욕구를 둘러싼 시장에 진입하고, 결과적으로 자신들이 가진 상품,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판매한다는 유일한 목적 아래 수행된다.
그러나 이러한 맥락에서 하나의 도발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거리에서 벌어진 이벤트에 이끌려 교회에 찾아온 사람이, 교회 안에서도 그에 못지않게 파격적인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과연 그곳에 계속 머무르겠는가? 대부분의 교회에서와 동일한 방식으로 거행되는 전례가 마케팅 기법에 현혹되어 찾아온 참여자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겠는가?”¹⁶
이러한 사고를 한 걸음 더 밀고 나가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하느님의 사랑에 관한 진리가 상품으로, 복음의 수신자가 잠재적인 고객으로, 이른바 복음 전파자가 판매원으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 판매원의 성공과 자아실현을 가늠하는 척도는 자신이 제시한 사상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의 수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어쩌면 이러한 틀 안에서 오늘날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수가 감소하는 이유에 관한 답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유시장의 논리, 곧 수익성과 유용성의 논리는 인간을 충만한 삶으로 이끌 수 없으며, 그 결과로 남는 것은 실망과 새롭고 더욱 강렬한 자극을 향한 끊임없는 탐색이다. 따라서 이러한 원칙을 따르는 사목 활동은 종교적 ‘고객들’의 이탈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이 인간에게 영성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보르기(Borghi)가 지적하듯이, 오늘날 **“영적 차원은 가능하고 흥미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¹⁷ 그러나 이는 오히려 “지금까지 그러한 탐구를 형성해왔던 전통적인 경로들 바깥에서” 이루어진다.¹⁸
실제로 전통적인 경로가 소비자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소비자는 대안적인 공급자들에게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권리가 있는 것이다.
3. 교회는 어떤 전례를 거행해야 하는가?
What kind of liturgy should the Church celebrate?
앞서 논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는 현대인에게 어떤 전례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이러한 질문 자체가 전제하는 욕구와 그 충족의 논리를 의식적으로 넘어서기 위해서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유시장과 상업주의, 그리고 욕구 충족의 논리에서 벗어나 삶의 또 다른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다.
실제로 이윤과 욕구 충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에는 패배, 주류로부터의 탈락, 파산과 결부되는 영역이 존재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상실의 공간은 하느님의 자유롭고 무사심한 현존이 다시 빛을 발할 수 있는 장소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하느님은 ‘일상적인’ 세계의 바깥에서, 곧 ‘시장’의 외부에서 자신을 내어주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먼저 전례 거행의 내용을 살펴보고, 이어서 그 형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3.1. 전례 행위의 핵심 내용으로서 무사심의 신비
The mystery of selflessness as the main content of a liturgical act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 헌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당신의 교회 안에, 특히 전례 거행 안에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전례 헌장 7항 참조).
그러므로 전례는 단순한 어떤 ‘것’도 아니며, 단순한 대상도 아니다. 왜냐하면 전례 자체가 실상 어떤 분의 현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고, 신비 안에서 교회에 주어진 하느님의 현존이다.
따라서 전례의 의식과 말씀을 통하여 실현되는 신비의 내용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전례 헌장 48항 참조).
앞서 언급한 경제적 개념들을 빌려 표현하자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자신은 비경제적이며 수익성을 지니지 않는 존재로 나타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성육신의 참된 신비는 자신을 비우는 것, 치욕, 그리고 패배로 드러났다(필리피서 2:5–11 참조).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실 때 예수께서는 성공의 논리에 현혹되지 않으셨으며(마태오 복음 4:1–11 참조), 사람들이 그분을 왕으로 선포하려 했을 때에는 스스로 모습을 감추셨다(요한 복음 6:15 참조).
예수께서는 추종자를 얻기 위해 사람들을 치유하신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분을 따르던 많은 사람은 자유롭게 그분을 떠나기도 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마침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 대신에,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셨다.” (히브리서 12:2)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을 향한 자신의 자유롭고 무사심한 사랑을 드러내셨다.
그분은 용서하기 위해, 그리고 내어주기 위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는 사랑을 드러내셨다.
또한 거부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랑, 자신이 향하는 대상에게 스스로를 강요하지 않는 사랑을 나타내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하느님이 모든 자녀를 돌보시는 아버지이심을 세상에 전하고 계시하셨다(제5감사기도 참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느님은 단순히 경쟁에서 탈락한 하느님이 아니다. 그분은 자신의 본성상 시장 바깥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리고 바로 이 하느님께서는 가장 수익성이 없는 일을 행하셨다.
그분은 인간을 향한 무사심한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인간들에게 내어주신 것이다.
이처럼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을 내어주는 행위 안에서, 그분은 자신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만나셨다(사도행전 2:24–28, 시편 16:10 참조).
**이 무사심한 사랑의 승리, 생명을 향한 궁극적인 ‘예(Yes)’야말로 파스카 신비(Paschal Mystery)의 내용이며, 바로 이 파스카 신비가 모든 전례 행위의 내용이자 심장이다.**¹⁹
역설적이게도 복음이 지닌 도발적인 힘 전체는 바로 이처럼 ‘체계 바깥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다.
보르기(Borghi)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인간이 시장의 논리로는 하느님이 베푸시는 것과 같은 자유롭고 무한한 사랑을 결코 제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직관적으로도 느끼고 있다고 정확하게 지적한다.
시장 논리가 그러한 사랑을 제공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무사심이 경제적 규칙에서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사심은 세계시장에서 낯선 개념이다.
그러나 사랑은 여전히 부재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사랑은 여전히 인간을 매혹하는, 인간이 추구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 갈망하는 어떤 가치이다.²⁰
이 지점에서 첫 번째 도발의 지평이 열린다.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다. 이러한 신앙은 설령 그것이 숭고하고 가치 있는 상품으로 이해된다 하더라도, 상품시장에서 거래되는 또 하나의 물품이나 상품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에게 시장을 넘어서도록 요구하는 하나의 도발이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의 사랑에 ‘내맡기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보르기에 따르면, 이는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라 할지라도, 어떤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자신의 삶을 ‘구원’하려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²¹
이는 무사심한 사랑의 행위 속에 자기 자신의 삶을 내맡기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인간을 자유와 예속 사이, 사랑과 자기중심주의 사이, 무사심할 수 있는 능력과 이윤의 독재 사이에 세워놓는 하나의 도전이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이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이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에 관한 질문이 제기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은 중요해 보인다.
“변화된 인간학적 균형은 하느님께서 여전히 현대인을 ‘붙잡으실’ 수 있는 접점이 머리(지성)가 아니라 몸과 마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한다.”²²
바로 그곳에서 지적인 담론만이 아니라 **인간의 전인적 경험(holistic experience)**이 이루어질 수 있다.²³
바로 그 지점에서 인격의 내적 통일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도전으로 간주되는 신앙의 내용과, 몸과 마음을 참여시켜야 하는 신앙 전달의 형식이 만나는 접점에서 구체적인 전례적 경험의 지평이 열린다.
여기서 우리는 전례 거행의 몇 가지 중요한 특징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특징들은 교회가 현대사회와 적절히 소통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며, 그들이 시장의 영역을 넘어 하느님의 자유롭고 변함없는 사랑을 받아들이도록 초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3.2. 신비를 표현하는 방식으로서의 전례 거행
Liturgical celebration as a way of expressing the mystery
본질적으로 시장의 논리 바깥에 존재하는 무사심한 사랑의 신비는 그 형식이 내용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전례 의식 전체에서 실제로 거행되는 신비를 적절하게 반영할 수 있는 전례의 특징들을 부각하고자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의식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무용성(uselessness)**이다.²⁴
실제로 의식은 그 자체로 목적이다.
의식은 어떤 특정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측정 가능한 결과를 산출하지도 않는다.
현대사회에서 전례가 신뢰를 잃게 된 이유는 어쩌면 전례에 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이러한 무용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결국 수익성과 유용성에 따라 의미가 결정되는 삶에서도 노동이나 병원 방문과 같이 매력적이지 않은 활동을 위한 자리는 여전히 존재한다.
이러한 행위들과 의식적 활동을 구별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활동들이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반면, 전례적 활동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인간을 세상의 관점에서는 무용한 영역으로 들어오도록 초대하고, 그러한 진입에 도전하게 하는 행위와 마주하고 있다.
이는 신앙의 행위 자체와도 같다.
전례에 참여한다는 것은 성공의 독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능력과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그것은 인간 삶의 보다 깊은 의미를 향해 자신을 열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에 관한 질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전례에서 이러한 깊은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을 경험하는 것과 동일시된다.
따라서 의식의 무용성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태도(gratuitousness)와 무사심(selflessness)**을 낳는다.
이러한 것들은 단순히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인 요소가 아니다.
이러한 덕목들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머무르기를 바라는 우호적이고 친밀한 마음에서 나타난다. 구성원들은 하나로 결합하여 기쁨 속에서 서로의 시간과 물질적 재화를 나누며, 이는 특정한 의식이 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험 속에서는 정복보다 나눔이, 유용성보다 무사심이, 개인의 이익보다 인격적 관계가 우위를 차지한다.
의식적 사건은 단순히 일상적이고 소비지향적이며 이윤을 추구하는 인간 활동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전례 거행은 앞서 언급한 경제적 활동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전혀 다른 종류의 활동이다.
무용성이라는 특징에서 어느 정도 비롯되는 두 번째 특징은 바로 **자유(freedom)**이다.
전례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보다 깊은 의미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게 하고, 무사심의 의미를 깨닫도록 하는 능력에 있다.
전례를 거행하는 공동체의 임무는 선언하거나……
전례를 거행하는 공동체의 임무는 수익성이나 이익을 선언하거나, 그것을 논증하거나, 제안하는 데 있지 않다.
또한 공동체의 임무는 누구에게든 무사심한 예배 행위에 참여하도록 설득하거나, 심지어 강요하는 데 있지도 않다.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 경쟁적 소비주의를 넘어서기를 감행할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그에게 자유의 공간을 허용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 사랑의 본성에 부합하는 전례 거행의 특징이다.
인간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강요된 강제가 아니라 사랑의 분위기 속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도록 자유를 주셨다.
따라서 자유롭고 무사심한 방식으로 의식에 참여하겠다는 내적 동의는 전례적 사건을 온전히 경험하고 그 안에 참여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전례 거행의 내용을 드러내는 세 번째 특징은 아름다움과 미학이다.
여기서 아름다움은 신학적인 의미로 이해된다.
그리스도교 의식은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역사 속에 뿌리내린 창조적이고 능동적이며 시적인 방식으로, 하느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심으로써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의 광기와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것.”²⁵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다시 무사심과 무용성이라는 특징으로 돌아갈 수 있다. 아름다움의 차원에서 이러한 특징들은 기꺼이 낭비하려는 태도로 표현된다.
전례 거행의 아름다움은 준비를 위해 시간을 허비하고, 전례용 기물과 의복, 꽃, 성전의 장식에 돈을 낭비할 용기를 요구한다.
또한 전례 거행의 아름다움에는 기도문을 서둘러 낭송하지 않고, 몸짓을 천천히 수행하며, 성가를 부르는 데 충분한 시간을 할애함으로써 시간을 낭비하는 일도 포함된다.
우리의 논의를 완성하는 전례 거행의 마지막 특징은 **생명력(vitality)**이다.
생명력은 앞서 서술한 방식으로 전례가 거행될 때 탄생하는 열매로 간주된다.
의식이 무사심과 자유, 아름다움이라는 특성을 함께 갖추게 되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감정의 동요, 신체의 자발성, 상상력의 환상, 정신의 직관, 감정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형식.”²⁶
여기서 논의하는 생명력은 지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그것은 합리적 인식을 앞질러 가며, 구체적인 전례적 경험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수성은 이러한 생명력을 포착하고, 전례 거행 중에 일어나는 생명의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경험 속에서 인간에게 새로운 의미의 지평이 열린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 구축한 성공의 서사가 아니라,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관한 서사이다.
4. 이러한 전례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인가?
Is this a liturgy for everyone?
이러한 맥락에서, 과연 이와 같은 전례 거행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그 답은 경제적 논리를 넘어선다.
이러한 전례가 모든 사람을 끌어들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거부당하거나 무시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전례로 하여금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은 시장 바깥에 존재하며 경제적 논리에 익숙하지 않은, 무사심한 하느님의 신비를 표현할 수 있는 정체성이다.
전례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하느님 자신이 구원자이시며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을 전제한다.
또한 교회가 하느님의 작품이며, 세계의 역사가 하느님의 구원 이야기라는 믿음을 전제한다.
오직 사랑을 믿으며, 전례 거행에 무사심하게 참여함으로써 그 아름다움에 자신을 내맡길 준비가 된 사람들만이 그러한 전례에 참여할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맥락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Sacrosanctum Concilium)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공의회 교부들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사람들이 전례에 나아올 수 있기 전에 먼저 신앙과 회개로 부름받아야 한다.” (전례 헌장 9항)
실제로 참된 전례적 경험은 신앙을 선포받고,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메시지에 응답하며, 하느님 사랑의 무상성을 기념하기 위해 경제적 논리에서 벗어날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 주어질 수 있다.
이러한 틀 안에서 또 다른 문제가 등장한다. 바로 **증언(testimony)**이다.
지적인 담론보다는 경험에 더욱 개방적인 세계에서, 증언은 인간을 끌어들이고, 그의 내면에 질문을 불러일으키며, 그를 신앙으로 부르는 첫 번째 요인이다.
또한 증언은 생명을 부여하는 원천인 전례로부터 자신의 힘을 얻는다(전례 헌장 10항).
하느님의 현존으로 충만한 공간이자 시간인 전례는 그 안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내면에 깊이 스며들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신자들은 전례 거행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의 진정한 증인이 되며,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양식을 통해 세상으로 하여금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도록 만들 수 있다.
실제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시장에서 탈락할 것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세계에서, 체계 바깥에 머무르는 사람은 현대 문화 속에 잠들어 있는 의미에 관한 질문을 다시 일깨울 수 있다.”²⁷
더 나아가 전례 참여가 인간을 변화시키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닮게 만든다는 점에서, 우리는 증언의 본질적인 범주인 사랑에 도달하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적 증언은 어떤 특정한 활동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사랑을 나누고 받아들이는 데 있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증인들의 사명이 탄생한다.
그러한 사명은 시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자신에게 힘을 부여한 하느님의 무상적인 사랑을 맛본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
하느님의 무사심한 사랑을 기쁨으로 경험하는 증인만이 다음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티의 가장 해로운 차원을 이루는 근본적인 도그마, 즉 시장 바깥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가정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증인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인간 역시 자기 안에 품고 있지만, 자유롭게 성장하고 발전할 공간을 거의 얻지 못하는 충만함과 의미에 대한 갈망을 ‘일깨우는’ 사람이 된다.”²⁸
결론
Conclusion
이 논문에서 제시한 생각들은 현대인에게 어떤 전례 형식이 적합한가라는 질문에 실천적인 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생각들은 현대 문화와 사고방식을 규정하는 몇 가지 요인들에 문제를 제기하는 하나의 도발이다. 동시에 그리스도교 계시의 특징과, 그 결과로서 전례 거행의 특징을 묘사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하느님 사랑의 무상성은 성공을 추구하는 데 지친 인간에게 안식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여전히 달려갈 힘을 지닌 사람들이 있어, 상품 소비가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거짓된 약속에 자신을 내맡긴다 하더라도, 교회는 신앙의 수익성을 선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교회의 사명은 무사심한 사랑을 드러내는 데 있다.
그러한 사랑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도그마들이 제시하는 자아실현과 성공의 의미에 관해 질문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전례 거행 전체는 교회의 사명에 속한다. 전례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고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요한의 첫째 서간 4:16).
따라서 나는 무용성, 자유, 아름다움, 생명력이 인간의 마음을 자극하고 일깨울 수 있는 전례의 네 가지 차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거행하는 전례는 현대인을 경제적 논리 너머로 인도할 수 있다.
그곳에서 인간은 놀라움 속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삶의 차원에서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잃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새롭고 더욱 깊으며 충만한 삶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얻는 일이라는 사실을.
현대 세계에서의 교회와 전례
Kościół i liturgia we współczesnym świecie
초록 (폴란드어 원문 번역)
전례 거행의 형식에 관한 질문은 사목적 논의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 언제나 문화적 맥락과 전례의 신학적 차원을 모두 고려하는 성찰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이 논문은 현대 세계에서 전례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모색하려는 시도이다. 이 과정에서 오늘날의 문화와 그 문화에 고유한 사고방식을 고려하는 동시에, 거행되는 신비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간과하지 않고자 한다.
이를 위해 논문에서는 먼저 현대의 특징과 그것이 교회의 사고방식에 미치는 영향을 개괄한다.
그러한 배경 위에서 비로소 오늘날 전례 거행에 필수적인 것으로 보이는 특징들, 곧 전례 자체의 신학적 내용에서 비롯되는 무사심, 자유, 아름다움, 생명력을 제시한다.
주제어: 개인주의, 소비주의, 전례, 파스카 신비, 무사심, 자유, 아름다움, 생명력.
초록 (영어 원문 번역)
전례 거행의 이상적인 형식에 관한 질문은 사목적 논의에서 자주 제기된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에서 도출되는 답변들이 언제나 문화적 맥락과 전례의 신학적 차원을 모두 고려한 성찰에서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이 논문은 현대 세계에서 교회가 어떤 형식의 전례를 거행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능한 답을 탐구하려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 현재의 문화와 현대인의 사고방식을 고려하면서도, 거행되는 신비의 핵심적인 요소들을 생략하지 않는 전례 형식을 모색한다.
이 논문에서는 현대의 특징과 그것이 교회의 사유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할 것이다.
이러한 배경 위에서 오늘날의 전례 거행에 필수적인 것으로 보이는 요소들과 그 신학적 내용에 내재하는 특징들, 곧 무사심, 자유, 아름다움, 생명력을 제시할 것이다.
주제어: 개인주의, 소비주의, 전례, 파스카 신비, 무사심, 자유, 아름다움, 생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