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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계보 제 3논문 19~21

도덕의 계보 아카넷 박찬국역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금욕주의적 성직자들이 쓴 수단들, 즉 활력의 전체적인 약화, 기계적 활동, 자그마한 기쁨, 무엇보다도 ‘이웃사랑’에서 얻는 기쁨, 무리 조직, 공동체의 권력 감정을 일깨우고 그 결과 자신에 대해서 개인이 갖는 불만이 공동체의 번영에 대한 쾌감 속으로 사라지게 하는 것은 현대적 척도로 측정해보면 불쾌감과의 투쟁에서 사용된 순진한 수단들이다. 이제 더 흥미롭고 ‘순진하지 않은’ 수단들을 살펴보자. 이러한 수단들이 겨냥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이다. 즉 그것은 무절제한 감정 상태99)이다. 이것은 따분하고 마비시키는 오래된 고통을 잊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마취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 때문에 이 하나의 질문, 즉 “무엇을 통해서 무절제한 감정 상태를 조성할 수 있을까”라는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고안하는 것에서 성직자들이 보여준 창의성은 실질적으로 무궁무진했다. 이 말은 귀에 좀 거슬릴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내가 “금욕주의적 성직자가 항상 모든 강렬한 감정 속에 깃들어 있는 열광을 이용했다”라고 말한다면 이 말은 분명히 좀 더 기분 좋게 울리며 비위에 거슬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나약한 현대인들의 유약한 귀를 어루만져 주어야만 하는가?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들의 위선적인 말에 한 걸음이라도 양보하여 물러서야 하는가? 그들의 위선적인 말이 우리 심리학자들을 메스껍게 한다는 사실을 도외시하더라도, 그것에는 이미 행위의 위선이 깃들어 있다. 즉 심리학자가 오늘날 좋은 취미(다른 사람들은 정직성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인간과 사물에 대한 모든 현대적인 판단을 진흙투성이로 만들어놓은 수치스러울 정도로 도덕화된 말투에 저항하는 데 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자신을 기만해서는 안 된다. 현대의 영혼과 현대의 서적들에 가장 고유한 특징은 거짓이 아니라 그들의 도덕주의적인 기만 속에 깃들어 있는 체화된 순진함이다. 이러한 순진함을 곳곳에서 다시 발견해야만 한다는 것, 이것이 아마도 심리학자가 오늘날 부딪혀야만 하는 그 자체로 꺼림칙한 모든 일 중에서 아마도 가장 역겨운 일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위험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영락없이 우리를 심하게 구토하게 만든다. 나는 현대의 서적들이(만약 그것들이 계속해서 살아남는다면 ― 물론 우리가 이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 그리고 어느 날 더 엄격하고 더 강인하며 더 건강한 취미를 가진 후세대가 존재한다면) 그리고 현대적인 모든 것이 어떤 식으로 후세대에 사용되고 사용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구토제로 사용될 것이다. 그것이 이렇게 구토제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은 도덕적인 감미로움과 허위, 자신을 ‘이상주의’라고 부르면서 무조건 이상주의를 신봉하는 그것의 가장 내적인 여성주의 때문이다. 오늘날의 ‘교양 있는 자들’, 우리 ‘선량한 자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정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영예가 되지는 않는다! 진정한 거짓말, 참으로 단호한 ‘정직한’ 거짓말(이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플라톤에게서100) 듣는 것이 좋을 것이다)은 그들에게는 너무나 엄격하고 너무나 강력한 것이다. 이것은 그들에게 요구해서는 안 되는 것, 즉 그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자기 자신을 볼 것을, 그리고 그들 자신에게서 ‘참’과 ‘거짓’을 스스로 구별할 줄 아는 것을 요구한다. 그들에게 어울리는 것은 오직 부정직한 거짓말뿐이다. 오늘날 자신을 ‘선량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자는 누구나 부정직한 거짓말을 하고 터무니없이 거짓말을 하는 방식으로만 어떤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그들은 순진하고 충심에서 우러나는 방식으로 그리고 푸른 눈으로 고결하게 거짓말을 한다. 이 ‘선량한 사람들’ 모두는 이제 철저하게 도덕화되어 있으며, 정직에 관한 한 영원히 타락하고 영원히 망가뜨려지고 만다. 그들 중의 누가 ‘인간에 대한’ 진실을 견뎌낼 수 있겠는가? 혹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해서, 그들 중에 누가 진정한 전기(傳記)를 견뎌낼 것인가! 여기에 몇 가지 예가 있다. 바이런 경101)은 자신에 대해서 극히 사적인 몇 가지를 기록했지만, 토머스 무어102)는 그것들을 그대로 기록하기에는 ‘너무 선량했다’. 그는 친구의 원고를 불살라 버렸다. 쇼펜하우어의 유언 집행자였던 그비너 박사(Dr. Gwinner)103)도 같은 짓을 했다고 한다. 쇼펜하우어도 자신에 관해 기록했는데, 아마도 자신에게 불리한(‘자기 자신에 반(反)하는’) 몇 가지 것도 기록했기 때문일 것이다. 베토벤의 전기 작가인 유능한 미국인 세이어(A.W. Thayer)104)는 갑자기 자신의 작업을 중단했다. 이 존경할 만하고 순진한 삶의 어떤 지점에 이르렀을 때 그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어떤 영리한 인간도 오늘날에는 자신에 대해서 정직하게 기록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만약 그런 인간이 있다면 그는 성스러운 만용(蠻勇)으로 가득 찬 교단의 일원임이 틀림없다. 우리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자서전이 틀림없이 나오리라고 기대하지만, 그것이 빈틈없이 영리한 자서전이 될 것임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마지막으로 가톨릭 사제였던 얀센105)이 종교개혁 운동을 이루 말할 수 없이 꾸밈없고 천진난만하게 묘사함으로써 독일에서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공포를 불러일으켰는지를 생각해보자.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운동을 다르게 묘사한다면, 즉 만일 어떤 진정한 심리학자가 우리에게 진정한 루터에 대해서 묘사한다면, 다시 말해 시골 목사처럼 도덕주의적으로 순진하게 묘사하거나 개신교를 믿는 역사가처럼 단순하고 달콤하며 분별 있는 수줍음과 함께 묘사하지 않고, 오히려 텐106)(Taine)에서 보는 것처럼 영혼의 강함으로부터 ― 강함에 반(反)하는 영리한 관용으로부터가 아니라 ― 대담하게 묘사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인가?(덧붙여 말하자면, 독일인들은 강함에 반(反)하는 영리한 관용의 고전적인 유형의 아름다운 예를 만들어냈다. 그들이 레오폴드 랑케107)를 그들 자신의 일원으로 생각하면서 자랑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는 모든 강한 원인에 대한 타고난 고전적인 변호인이자108) 모든 영리한 ‘현실주의자’ 가운데 가장 영리한 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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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람들은 내 말을 이미 잘 이해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우리 심리학자들이 오늘날 자신에 대한 불신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닌가? 아마도 우리 역시 우리의 작업을 제대로 하기에는 아직 ‘너무나 선량하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이 도덕화된 시대의 취미를 경멸한다고 해도, 우리도 역시 그것의 희생물이고 제물이며 그것으로 인해 병든 자들일 것이다. 아마도 그 취미는 우리마저도 감염시킨 것이리라. 저 외교관109)은 자신의 동료에게 무엇을 경고했던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최초의 흥분을 믿지 맙시다! 그것들은 거의 항상 선한 것들입니다.” 오늘날 모든 심리학자는 자신의 동료들에게 그렇게 말해야만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는 우리의 문제로 되돌아가는데, 이 문제는 사실 우리에게 약간의 엄격함을 요구하며, 특히 ‘최초의 흥분들’에 대한 어떤 불신을 요구한다. 앞의 논문에서 말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감정의 무절제를 야기하는 데 사용된 금욕주의적 이상이라는 몇 마디 말에서 이제 기술할 것의 본질적 내용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망가뜨리면서, 그것이 번개의 섬광에 의한 것처럼 모든 사소한 불쾌감이나 음울함, 의기소침에서 벗어나도록 그것을 공포나 한기, 열뜬 감정과 환희 속으로 잠기게 한다는 것,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어떤 방법들이 사용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들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확실한 것일까? 근본적으로 모든 격렬한 감정, 즉 분노, 공포, 음욕, 복수심, 희망, 승리감, 절망, 잔인함과 같은 감정이 갑자기 폭발한다면, 그것들은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인간 안에 존재하는 모든 들개 떼 전체를 거리낌 없이 자신을 위해서 이용해왔다. 그는 항상 동일한 목적을 위해서 때로는 이 개를, 때로는 저 개를 풀어놓았던바, 그 동일한 목적이란 항상 종교적인 해석이나 ‘정당화’를 통해서 인간을 만성적인 우울로부터 깨어나게 하고 단지 잠깐만이라도 숨 막히는 고통과 지속적인 비참함을 쫓아버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감정의 무절제 모두가 나중에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것은 병자를 더욱더 병들게 만든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고통을 치료하는 것은 현대적인 척도로 평가한다면, ‘죄를 짓는(schuldig)’ 것이다. 그러나 공정하게 하려면, 우리는 더욱더 다음의 사실을 주장해야만 한다. 즉 그러한 치료는 떳떳한 양심과 함께 사용되었으며,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때로는 자신이 초래한 비참함 때문에 거의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면서도 그러한 치료법의 유용성과 필수 불가결함을 깊게 확신하면서 그것을 처방했다는 것이다. 또한 아마도 그러한 과도한 조치 때문에 빚어진 격렬한 생리적 복수는 심지어 정신 착란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기까지 했지만, 그것이 이런 종류의 치료법이 갖는 전체적인 의의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 이 치료법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병을 치료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우울증적인 불쾌감과 싸우고 그것을 완화하고 마비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은 그런 식으로 달성되었다. 금욕주의적 성직자가 인간의 영혼을 갈가리 찢으면서도 황홀하게 만들기 위해서 사용한 주된 방법은 주지하듯이 죄책감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감정의 기원을 우리는 앞의 논문에서 간략하게 서술했다. 다른 것이 아니라 동물 심리학의 일부로서 말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죄책감을 날 것 그대로의 상태로 다루었다. 죄책감을 다루는 진정한 예술가인 성직자의 손에서 죄책감은 비로소 형태를 얻게 되었다. 아, 그것은 어떤 형태인가! 성직자들은 동물적인 ‘양심의 가책(자기 자신에게 향해진 잔인성)’을 ‘죄악(Sünde)’이라는 것으로 재해석했다. 이러한 재해석은 병든 영혼의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다. 그러한 재해석은 종교적 해석이 사용하는 가장 위험하고 치명적인 전략이다. 어떤 식으로든 괴로워하는 인간, 즉 우리 안에 갇혀 있는 동물처럼 이유와 목적을 모른 채 어떻든 생리적으로 괴로워하는 인간은 [자신의 고통에 대한] 이유를 찾고자 한다. 고통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고통이 완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고통에 대한 치료제와 마취제를 구하며, 마침내는 비밀을 알고 있는 한 사람에게 조언을 구한다. 보라! 그는 암시를 얻는다. 그는 자신의 마법사인 금욕주의적 성직자에게서 자신의 고통의 ‘원인’에 대한 최초의 암시를 얻는 것이다. 그는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즉 죄에서, 과거의 한 단편에서 찾아야 하며, 자신의 고통을 벌이라고 이해해야만 한다. 불행한 자인 그는 [자신의 고통의 원인을] 들었고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 그는 한 마리 암탉, 즉 자신을 둘러싸고 그어진 선에 갇혀버린 암탉처럼 되어버린다. 그는 선으로 만든 이 원에서 다시 빠져나오지 못한다. 한갓 병자였던 자가 이제 죄인이 되어버렸다. 이후 2000년 동안 우리는 이 새로운 병자인 ‘죄인’의 모습을 보아왔다. 언젠가 그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될 때가 올까? 우리가 어디를 보든 곳곳에, 항상 하나의 방향을(고통의 유일한 원인으로서 죄만을) 바라보도록 최면에 걸린 죄인의 응시가 존재한다. 어느 곳에서든지, 루터가 말하는 ‘소름 끼치는 동물’인 양심의 가책이 존재한다. 어느 곳에서든지, 과거를 반추하고 있고 [자신이 했던] 행위를 왜곡 해석하며, 모든 행동을 ‘불을 켜고 바라보는 눈’이 존재한다. 어느 곳에서든지 고통을 왜곡되게 해석하려는 의지가 삶의 내용을 이루고 있으며, 고통을 죄책감, 공포감, 벌로서 느끼는 감정으로 전환하려고 한다. 어느 곳에서든지 채찍질, 낡아빠진 셔츠 , 굶주린 신체, 참회가 존재한다. 어느 곳에서든지 불안하고 병적으로 예민한 양심의 잔인한 수레바퀴 밑에 깔려 자신을 파멸시키려는 죄인이 존재한다. 어느 곳에서든지 무언의 고통, 극도의 공포, 고문당하는 마음이 겪는 단말마(斷末魔)의 고통, 알지 못할 행복의 경련, ‘구원’을 바라는 외침이 있다. 오랜 우울증, 중압감, 피로감은 이러한 방법들의 체계에 의해서 사실상 철저하게 극복되었고, 삶은 다시 매우 흥미로운 것이 되었다. 깨어 있는 상태로, 영원히 깨어 있는 상태로 밤을 지새우고, 작열하면서, 숯이 되도록 타고, 탈진했지만 피로하지는 않다. 이러한 신비[고통이 죄의 결과가 되는 신비]를 체험하게 된 ‘죄인’은 그러한 모습을 보였다. 불쾌감과 투쟁하는 이 늙은 위대한 마법사인 금욕주의적 성직자가 승리한 것이 분명했다. 그의 왕국이 도래했다. 이미 사람들은 고통에 대해서 더는 불평하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고통을 갈망했다. 그의 제자들과 그에게 빠져 있는 자들은 수 세기 동안 고통을 갈망하면서 “더 많은 고통을! 더 많은 고통을!”이라고 외친 것이다. 고통스러운 모든 무절제한 감정, 으깨고 뒤집어엎고 분쇄하면서도 황홀하게 하고 도취하게 하는 모든 것, 고문실의 비밀, 지옥 그 자체의 발명, 이 모든 것이 발견되었고 추측되었고 이용되었다. 모든 것이 마법사에 의해 이용되었고, 그 후로 이 모든 것이 그의 이상, 즉 금욕주의적 이상이 승리하는 데 이용되었다. “나의 왕국은 이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110)라고 그는 전과 다름없이 말했다. 그러나 그에게 진정 그렇게 말할 권리가 있는 것일까? 괴테는 오직 36가지의 비극적 상황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111) 우리는 여기에서 ― 비록 그 외의 것은 모른다고 하더라도 ― 괴테가 결코 금욕주의적 성직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추측할 수 있다.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더 많은 비극적 상황을 알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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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따위의 성직자적 치료법, 즉 ‘죄책감을 조장하는’ 치료법에 대해서는 비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금욕주의적 성직자가 자신의 병자들에게 처방하던(자명한 사실이지만, 가장 신성한 이름 아래, 또한 자신의 목적이 신성하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그러한 감정의 무절제가 환자에게 효험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효험이 있었다’라고 주장하려면] 적어도 ‘효험이 있다’라는 말의 의미를 분명히 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한 치료체계가 인간을 개선했다는 의미로 그 말을 사용하려 한다면, 나는 이에 대해 아무런 이의가 없다. 다만 나는 이 경우 ‘개선되었다’라는 것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덧붙이고 싶을 뿐이다. 그것은 나에게는 ‘길들었다’, ‘약화되었다’. ‘용기를 잃었다’, ‘섬약해졌다’, ‘연약해졌다’, ‘거세되었다’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말은 손상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치료법이 병자, 언짢은 자, 의기를 상실한 자에게 주로 적용될 때, 그것은 병자들을 ‘개선한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더 병들게 만든다. 자학적인 참회, 회한 그리고 구원의 발작이 치료법으로서 적용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정신과 의사에게 한 번 물어보라. 또한 역사에 한 번 물어보라. 금욕주의적 성직자가 이러한 치료법을 적용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병은 놀라운 속도로 심화되었고 확산되었다. 그 ‘결과’는 항상 어떻게 나타났는가? 그렇지 않아도 이미 병든 상태에서 신경 체계의 파괴가 일어났다. 이는 대규모로든 소규모로든 개인과 집단 모두에게 일어났다. 우리는 참회와 구원을 위한 훈련의 결과로서 무서운 간질병이 유행하는 것을 보게 된다. 역사에 잘 알려진 가장 큰 것으로는, 중세의 성 비투스와 성 요한의 무도병(舞蹈病)112)이다. 또한 그러한 훈련이 미친 악영향으로서 무서운 마비증과 만성적인 우울증을 보게 되는데, 이것들로 인해 때때로 한 민족이나 한 도시(제네바, 바젤)의 기질이 단번에 정반대의 것으로 변하게 된다. 몽유병과 유사한 마녀사냥의 히스테리도 그러한 악영향에 속한다(1564년에서 1605년까지만 해도 마녀사냥이 무려 여덟 번이나 크게 유행했다). 그러한 훈련의 결과로 또한 죽음을 열망하는 저 집단적인 정신착란증을 보게 된다. 이러한 정신착란증에 걸린 자들이 외치는 ‘죽음 만세’라는 소리는 어떤 때는 음욕에, 어떤 때는 파괴욕에 사로잡힌 병적인 특이체질에 의해 중단되기도 했지만, 유럽 전역에 울려 퍼지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금욕주의적 죄악설이 다시 큰 성공을 거둘 때는 항상 감정의 동일한 변화가 곳곳에서 동일한 간격과 반전(反轉)과 함께 일어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종교적 신경증은 ‘악마’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종교적 신경증이란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문제이다). 대체로 금욕주의적 이상과 그것의 숭고한 도덕적인 의례, 즉 신성한 목적이라는 이름으로 감정의 무절제를 낳는 모든 수단의 가장 교묘하고 가장 대담하며 가장 위험한 체계화는 무섭고 잊을 수 없는 방식으로 인류의 역사 전체에 기록되었다. 유감스럽게도 인류의 역사에 기록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금욕주의적 이상만큼 건강과 인종적 힘에, 특히 유럽인의 건강과 인종적 힘에 파괴적인 영향을 끼친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우리는 그것을 유럽인 건강의 역사에서 진정한 재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금욕주의적 이상의 영향에 견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게르만인의 독특한 영향 정도이다. 이것으로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유럽의 알코올 중독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독일인의 정치적·인종적 우세와 정확하게 보조를 맞추면서 일어났다(게르만인은 자신의 피를 주입하는 곳에서 반드시 자신들의 악덕도 주입했다). 세 번째로는 매독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세 번째 것이지만 앞의 둘로부터 큰 간격으로 떨어져 있다.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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