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심을 위한 권력욕의 실현과 안락함을 위한 이타적인 행동들을 하면서 산다. 이런 주장을 하면 신경과학적 반론이 가능하다.
- 운동해라
- 햇빛을 보라
- 수면을 취해라
- 공동체에 소속되라
- 소화 및 구강건강, 호흡기
- 체념과 받아드림 감정 격동의 축소
- 습관화 및 명상
- 항정신의약물
등등... 위의 내용만 지켜지면 문제가 없다.
일정부분은 만족하지만, 우리의 모든 질문과 문제에 대한 대답이 되어줄 수 없다. 약간의 위선이 있다. 예를들면 인간의 불행의 해결책으로 (부작용이 없으며 항상성에 영향받지 않는)마약을 투여해야 한다는 주장과 같다. 이것은 불행을 축소하는것만은 가능하지만 더 이상 능동적인 행동이 되어주지 못한다. 진정제든 흥분제든 각성제든 상태일 뿐 삶의 긍정이 아니다. 내일 아침이 기대되지 않는다.
주거를 제공하고, 오락을 제공하고, 음식과 영양을 제공하고, 건강을 주었음에도, 사람은 여전히 불행과 불만을 느낀다.
사람은 압도적인 힘을 원하는 것이다.자제와 절제, 그리고 그것들의 궁극적 동기.—나는 격렬한 충동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방법 이외에 어떤 방법도 발견할 수 없다. 이 방법들은 본질적으로 서로 성질이 다르다. 첫째, 충동을 만족시킬 수 있는 기회들을 피하면서 가능한 한 오랫동안 불만족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충동을 약화하고 시들게 할 수 있다. 둘째, 충동을 만족시킬 때 자신에게 엄격한 규칙을 부과할 수 있다. 이렇게 충동 자체에 규칙을 부과함으로써, 그리고 그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시간을 정하고 제한함으로써 사람들은 더 이상 충동에 의해 교란되지 않는 시간들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아마도 이를 통해 첫 번째 방법으로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의도적으로 충동을 거칠고 자유분방하게 만족시키면서 역겨움을 불러일으키고, 이러한 역겨움을 통해 충동을 이겨내는 힘을 획득할 수 있다. 이 경우 죽을 때까지 말을 몰아대다가 결국 자신의 목마저 부러뜨리고 마는 기수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방법에서는 그 기수처럼 되는 것이 보통이다. 넷째, 지적인 책략이 있다. 즉 매우 고통스러운 생각을 만족 전체와 확고하게 결부한다. 이런 방법을 약간 연습한 후에는 충동을 만족시키려는 생각 그 자체가 늘 즉시 고통스러운 것으로 느껴지게 된다(예를 들어 기독교인이 성적인 향락에 직면해 가까이 있는 악마가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복수를 위한 살인과 관련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생각하거나, 예를 들어 그가 존경하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돈을 훔칠 경우에 따를 경멸을 생각하는 데 길들어 있을 경우, 혹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백 번이나 자살하고 싶은 격렬한 욕망 때문에 친척들과 친구들이 갖게 될 비탄과 자책을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간신히 유지해온 경우 이제 이 생각들이 원인과 결과처럼 잇달아 일어나게 된다.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경과 나폴레옹의 예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인간의 긍지가 한껏 고양됨으로써 욕망이 자신의 전체적인 태도와 이성의 질서를 지배하게 되는 것을 모욕으로 느끼는 것도 이러한 방법에 속한다. (바이런은 일기에 “나는 식욕의 노예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썼다.) 다섯째, 무언가 특히 어렵고 힘이 드는 일을 자신에게 부과하거나 의도적으로 새로운 자극과 즐거움에 몸을 맡기는 방식으로 생각과 육체적인 힘의 움직임을 다른 길로 유도함으로써 많은 힘의 방향 전환을 시도할 수 있다. 아울러 일시적으로 다른 충동을 우대하고 이 충동이 만족할 수 있는 기회를 풍부하게 제공함으로써,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그 격렬함으로 인해 성가시게 되었을 충동이 사용할 힘을 소모할 경우에도 역시 결과는 동일하다. 전자의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이든 후자의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이든 이들은 자신들이 잘 알고 있는 모든 다른 충동들에 일시적인 고무와 축제의 시간을 주고, 전제 군주처럼 군림하려 했던 충동이 혼자 먹어치우려 했던 먹이를 그 충동들에 나누어 줌으로써 그 충동을 억제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섯째, 육체와 정신의 조직 전체가 약화되고 억제되는 것을 견디고 이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물론 이런 방법을 통해 개별적인 격렬한 충동을 약화한다는 목표에 도달한다. 예를 들어 고행자처럼 자신의 감각을 철저히 굶기고, 이와 동시에 자신의 육체와, 종종 자신의 지성도 함께 굶김으로써 쓸모없게 만드는 사람의 방법이 여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충동을 만족시킬 수 있는 기회를 회피하는 것, 규칙을 충동에 심는 것, 충동에 대한 포만감과 역겨움을 만들어내는 것, 고통스럽게 하는 생각(치욕, 나쁜 결과 혹은 모욕당한 자존심과 같은)을 연상하는 것, 그 다음에는 힘들의 방향 전환, 마지막으로 육체와 정신 전체의 약화와 탈진—이것이 여섯 가지 방법이다. 그러나 어떤 격렬한 충동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는 우리의 권능 밖에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방법을 사용하는가, 이 방법으로 효과를 거두는가 못 거두는가 하는 것 역시 우리의 권능 밖에 존재한다. 오히려 이 과정 전체에서 우리의 지성이 우리를 괴롭히는 격렬한 충동의 경쟁자인 다른 충동의 맹목적인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것이 안식에 대한 충동이든지, 치욕이나 다른 나쁜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나 사랑이든지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충동의 격렬함에 대해 한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근본적으로 볼 때 사실은 다른 충동에 대해 어떤 충동이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충동의 격렬함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이 충동과 똑같이 격렬하거나 훨씬 더 격렬한 다른 충동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우리의 지성이 어느 쪽이든 편을 들어야만 하는 투쟁이 임박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