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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생활자의 수기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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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1. 나는 병적인 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나는 남의 호감을 사지 못하는 인간이다. 이것은 아무래도 간장이 나쁘기 때문인 것 같다. 하기는 나 자신의 병에 관해선 아무것도 아는 게 없을 뿐 아니라 내 몸의 어디가 나쁜지 그것조차 확실히는 모른다.

  2. …하기는 내 말이 틀렸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그렇게들 하고 있으니 말이다. 모두들 자기 병을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그 중에서도 아마 나는 가장 심한 부류에 속할 것이다. 하여튼 더는 왈가왈부하지 말기로 하자. 나의 항변 같은 건 바보스럽게 들릴 테니까. 그러나 나는 진심으로 확신하고 있다――의식의 과잉은 고사하고, 어떤 종류의 의식이건 의식은 모두 병이라고. 나는 그렇게 주장한다. 하지만 이 문제도 잠시 미루어두기로 하고, 우선 이런 의문에 대답해 주기 바란다. 대체 무슨 이유로 나는 언제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즉 한때 우리들 사이에서 운위되던 ‘모든 아름답고 고귀한 것’의 미묘한 뉘앙스를 의식하기에 가장 적합한 심적 상태에 놓인 순간에, 그것을 의식하기는커녕 도리어 그토록 추악한 짓을 하게 되었을까? 더구나 그것은…… 뭐랄까, 한마디로 말해서 모두들 하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나로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다. 나는 선(善)이라든가, 그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라든가 하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면 할수록, 더욱 깊숙이 자기 내부의 흙탕 속에 빠져들어 옴짝달싹도 못하게 되어버린다. 무엇보다 난처한 것은, 그것이 모두 우연이 아니고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같이 생각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마치 그것이 나의 정상적인 상태인 것같이 여겨지고, 결코 병이나 변태로는 생각되지 않으므로, 결국 이 변태와 싸우려는 생각은 아주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이것이 나의 정상적인 상태인가 보다, 라고 거의 믿기에 이르렀다(어쩌면 정말로 그렇게 믿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3. 그래도 처음 얼마 동안은 이 투쟁 때문에 나도 무척 고민했다. 나는 누구나 다 그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그후 이 일을 마치 무슨 큰 비밀이나 되는 것같이 숨기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부끄러웠던 것이다(하기는 지금도 부끄럽게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는 무언가 비정상적인, 비열한, 비밀스런 쾌락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4. 첫째, 내가 주위의 누구보다도 현명하다는 게 좋지 않다(나는 항상 주위의 누구보다도 현명하다고 자인했고, 때로는 당신들은 곧이듣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그것을 오히려 거북하게 여길 지경이었다. 적어도 나는 한평생 남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본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따라서 늘 외면하는 버릇이 있었다). 둘째로는 비록 내가 고결한 정신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아무 소용 없는 것이라고 의식함으로써 오히려 괴로움만 더할 뿐이니, 이것 역시 나한테는 좋지 않은 점이다. 내가 고결한 정신을 지녔다 해도 결국은 아무 일도 해내지 못할 것이며, 누구를 용서할 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례한 자가 나를 구타한 것은 필시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한 짓일 것이므로, 자연의 법칙을 용서한다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걸 잊어버릴 수도 없다. 설사 자연의 법칙이라 하더라도 화가 나긴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으로, 설사 내가 고결한 체하지 않고 나의 모욕자에게 복수하려고 마음먹었다 해도 결국 아무한테도 복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설사 내 힘으로 가능하다 하더라도 결국은 아무것도 단행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왜 단행하지 못하는가? 이 점에 대해서 나는 특히 한마디 하고 싶다.

  5. 거기에서, 악취가 풍기는 더러운 지하실에서 모욕과 냉소에 짓밟힌 우리 생쥐는, 냉랭하고 독기 찬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증오에 잠긴다. 그리고는 40년쯤 계속해서 자기가 당한 수치스러운 모욕의 극히 세세한 점까지 남김없이 상기하고는 그럴 때마다 더욱 수치스러운 세부를 제멋대로 덧붙이면서 자기의 공상으로 짓궂게 자신을 조롱하고 자극하는 것이다. 즉 자기의 공상을 부끄럽게 여기면서, 여전히 모든 것을 상기하여 마음속에서 자꾸만 되씹다가, 이런 것도 역시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다는 구실 하에 얼토당토 않은 것을 꾸며내서 자기 자신을 모욕한다. 이렇듯 무엇 한 가지 관대하게 눈감아 버리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설사 복수를 시도한다 하더라도 남 모르게 살금살금 하려든다. 따라서 자기의 복수의 권리도 그 성공도 믿지는 않는다. 또한 복수를 시도한다손 치더라도 상대방보다는 오히려 자기 쪽이 1백 배나 고민할 것이며, 상대방은 아무렇지도 않으리라는 것을 미리부터 잘 알고 있는 것이다.

  6. 이런 돌벽은 일종의 진정제 같은 것으로, 실제에 있어 평화를 가져오는 무슨 주문 같은 것이 거기 깃들여 있기라도 한 것처럼 세상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오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 거기에 비하면,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것을 의식하고 모든 불가능과 돌벽을 달관하면서 만약에 타협이 싫으면 모든 불가능과 돌벽의 어느 하나와도 타협하지 않는 편이 얼마나 떳떳하고 훌륭한지 모른다. 그러나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논리적 콤비네이션의 길을 택하면서, 이 돌벽에 관해서도 뭔가 자기한테 잘못이 있다는 식의 영구불변의 테마에 빠져 더없이 저주스런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물론 자기한테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건 여기서는 불을 보듯 명백하지만 말이다). 그 결과 말없는 무기력한 저주를 계속할 뿐, 화를 내려 해도 상대가 없음을 어렴풋이 의식하면서 멍청한 타성 속에서 감각을 마비시켜 버린다. 사실 화를 내려 해도 상대가 없다. 어쩌면 영원히 그 대상은 나타나지 않을는지 모른다. 이것은 필시 사기도박꾼이 하는 것 같은 카드 바꿔치기로 뭔가 속임수를 당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시궁창물이다――뭐가 뭔지, 누가 누군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혼돈과 바꿔치기에도 불구하고, 역시 무언가 아픔을 느낀다. 그리고 무슨 영문인지 모르게 되면 될수록 아픔은 더욱 심해지는 것이다.

  7. “우, 아, 하하! 그러고 보니 너는 치통에서도 쾌감을 발견하려는가 보군!” 당신들은 웃음과 함께 이렇게 외칠 것이다.
    “그게 어쨌단 말인가? 치통에도 쾌감은 있는 법이다” 라고 나는 대답하겠다. “나는 한 달 동안이나 계속해서 치통에 시달린 일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도 쾌감이 있다는 걸 확실히 알고 있다. 물론 그 경우엔 말없이 화만 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끙끙 신음소리를 내게 마련인데, 이 신음소리는 정직한 것이 못 된다. 그것은 심술궂은 데가 있는 신음소리이며, 바로 그 심술궂음 속에 뭐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로 이 신음 속에 괴로워하는 자의 쾌감이 표현되는 것이다.” 만약에 쾌감을 느끼지 않는다면――그는 신음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좋은 예이니, 여러분 이 문제를 한 번 발전시켜 보기로 하자. 이 신음소리 속에는 첫째, 본인의 의식하는 바로서는 굴욕적인 고통의 무목적이 표현되어 있다. 즉 이것은 자연의 합법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런 건 당신들에겐 한 푼의 가치조차 없지만, 그래도 당신들은 그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은 아무렇지도 않다. 따라서 적은 어디에도 없는데 고통은 존재한다는 의식이 표현되는 것이다.

  8. “흥, 그렇다면 역시 이익임에는 틀림없지 않은가!” 하고 당신들은 내 말을 가로챌 것이다. 그러나 실례지만 우린 아직 이야기를 충분히 주고받지 못했다. 그리고 문제는 말재주를 부리는 데 있는 게 아니다. 이 이익의 특징은 일체의 분류를 파괴하고, 인류애를 내세우는 자들이 인류의 행복을 위해 설정한 체계를 송두리째 때려부수는 데 있다. 요컨대 이 이익은 세상의 모든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이익의 이름을 당신들에게 밝히기 전에, 나 자신의 명예의 손상을 무릅쓰고 대담하게 선언하련다――그와 같은 훌륭한 체계는 다시 말해서 인류에게 진짜 정신적인 이익을 설명하면서 ‘이걸 획득하려고 노력하기만 하면 당장에 선량하고 고결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설득하는 그런 이론은, 지금 내 생각으론 한낱 졸렬한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렇다, 졸렬하기 짝이 없는 논리이다.
    다시 말해서, 바겐하임〔독일의 유명한 치과의사〕 같은 명의(名醫)가 아무리 세상에 많더라도 당신들은 완전히 자기 이의 노예가 되어 있어서, 만약에 누군가가 마음이 내켜서 당신들의 치통을 없애주면 모르되,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3개월 동안은 아픔이 계속되리라는 의식의 표현이다. 그리고 당신들이 언제까지나 그것을 납득하지 않고 여전히 반항을 계속한다면 당신들은 단지 자위를 위해 자기 자신을 때리든가, 주먹을 움켜쥐고 장애물인 벽을 힘껏 치든가 그 밖의 다른 방법은 없다는 의식의 표현이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 피 나는 굴욕감과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조소가 원인이 되어 마침내는 정욕의 극에 도달할 만큼의 쾌감이 시작되는 것이다. 여러분, 나는 당신들한테 부탁하고 싶다. 언제든 19세기의 교양인이 치통에 시달리면서 신음하는 소리에 한 번 귀를 기울여주기 바란다. 그것도 아프기 시작한 지 이틀째나 사흘째 정도가 알맞다. 그때는 첫날과는 신음소리가 상당히 달라진다. 즉 단순히 이가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소박한 농사꾼이 내는 그런 신음소리가 아니라, 유럽 문화의 세례를 받은 개명된 인간의 신음소리, 다시 말해서 이른바 ‘조국의 땅과 국민적 본질에서 동떨어진’ 인간의 신음소리인 것이다. 그의 신음소리는 어딘가 더럽고 메스껍고 짓궂은 가락을 띠면서 밤낮없이 계속된다. 그렇게 신음해 봐야 아무 소용도 없으며, 공연히 자기와 타인을 지치게 하고 초조하게 만들 뿐이라는 것은 본인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가 그토록 애써서 자기의 고통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타인들도, 가족들도, 그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이제는 전혀 그 진실성을 불신하고 혐오감마저 느끼면서 저렇게 이상한 가락을 붙이거나 이상한 기교를 부리지 말고 좀더 솔직히 신음할 수도 있을 텐데, 저건 단지 악의에 찬 심술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속으로 생각한다――이것도 본인 자신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자의식과 굴욕 속에 정욕과도 같은 쾌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당신들을 괴롭히고 신경을 쥐어뜯고 있다. 그리고 집안 사람들을 못 자게 하고 있다. 그러니 모두들 자지 말라. 내가 이를 앓고 있다는 것을 당신들은 끊임없이 느껴야 한다. 전에 나는 당신들한테 영웅처럼 보이려고 했지만, 지금은 한낱 추악한 무뢰한으로밖엔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래도 좋다! 당신들이 내 본성을 간파해 주어 나는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다. 당신들은 내 야비한 신음소리가 듣기 싫을 테지…… 흥, 그렇다면 마음대로 해라. 이제 더욱 듣기 싫은 가락을 붙여 들려줄 테니…….” 자, 여러분, 이래도 아직 모르겠는가? 아니, 이 쾌감이 지니는 온갖 뉘앙스를 이해하려면 좀더 깊이 정신적으로 성장하여 모든 것을 철저하게 자각하여야만 될 것 같다. 당신들은 웃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도 유쾌하다. 물론 나의 익살은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한 데다가 자신감도 없어보일 테지만, 그건 내가 나 자신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자의식이 발달한 인간이 어찌 자기를 존경할 수가 있겠는가?

  9. 다시 묻겠다――자기 자신의 굴욕감 속에서조차 쾌감을 발견하려는 그 따위 인간이 과연 조금이라도 자신을 존경할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새삼스레 무엇을 뉘우치는 마음에서가 아니다. 원래가 나는 ‘아빠,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하는 식의 말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성미였다. 그것도 내가 그런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지나치게 그런 말을 많이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말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나는 꿈에서도 전혀 나쁜 짓을 한 기억이 없을 때 곧잘 그런 소릴 하곤 했다(이것이 무엇보다 좋지 않다). 그럴 때 나는 진심으로 감격하여 후회의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물론 나는 스스로를 기만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연극을 한 건 아니다. 무엇 때문인지 그저 내 마음이 그런 우스꽝스런 짓을 시키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평생을 두고 나를 모욕해 왔지만, 이 경우 그 자연율도 탓할 수는 없다……. 이런 일은 돌이켜 생각하는 것조차 불쾌하다. 물론 그 당시도 불쾌했었다. 사실 1분도 채 지나기 전에 나는 벌써 마음속으로 이를 갈면서, 이건 순전히 거짓이다, 모든 게 거짓이다, 일부러 꾸며낸 거짓이다, 이런 참회는, 감격은, 갱생의 맹세는, 모두가 다 거짓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스스로 기만하고 괴롭혔던가? 그 대답은――멍청히 팔짱을 끼고 있기가 너무나 따분해서 약간 재주를 부려본 것뿐이다, 라고 나올 것이다. 사실 그렇다. 당신들도 자기 자신을 잘 관찰해 보라. 사실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될 테니.

  10. 이래서 결국은 단념해 버리는 수밖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근본 이유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기는 근본 이유 같은 건 따지지 말고 잠시 의식을 물리치고 맹목적으로 자기 감정에 이끌려가는 것도 좋다. 팔짱을 끼고 멍청히 앉아 있지 않기 위해서, 증오하든 사랑하든 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아무리 늦어도 사흘째에는 자기 자신을 경멸하게 될 것이다. 뻔히 알면서 자기 자신을 기만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나중에 남는 것은 비누 거품과 타성뿐이다.
    아아, 여러분, 내가 스스로 현자로 자처하는 것은 한평생 무엇 한 가지 시작할 수도 완성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보고 수다를 떤다고 해도 좋다. 부질없는 장광설을 늘어놓는다고 핀잔을 한대도 상관없다. 그러나 모든 현자들의 유일한 사명이 공허한 장광설을 늘어놓는 데 있다고 한다면 이건 어찌할 수 없는 일 아닌가.

  11. 첫째, 천지 개벽 이래 단 한 사람이라도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한 사람이 있었을까? 인간이란 자기의 참된 이익을 잘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밀어젖히고 아무에게도 아무것에도 강제되고 있지 않은데도 다른 모험의 길로 돌진하는 법이다. 이것을 증명하는 무수한 사실들을 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인간이란 정해진 길을 고지식하게 걸어가기가 싫어서 오기로라도 그와는 다른 고통스런 길을, 어둠 속을 더듬듯 고생하면서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오기와 고집은 정녕 그 어떤 이익보다도 기분이 좋은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익이라! 도대체 이익이란 뭔가? 인간의 이익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을 당신들은 꼭 집어서 정확히 정의할 자신이 있는가?

  12. 그보다도 만약에 인간의 이익이란 것이 자기에게 유리한 것보다는 불리한 것을 원하는 데 있다고 한다면 어떨까? 만일 그렇다면, 언제나 이 만약의 경우만이 일어난다고 한다면, 모든 법칙은 산산조각 나버리지 않겠는가? 과연 이런 경우가 자주 있을까?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웃고들 있군. 웃어도 좋다. 하지만 한 가지 물음에 대한 여러분의 대답만은 듣고 싶다. 과연 인간의 이익이란 것은 절대적으로 정확히 계산된 것일까, 여태까지 어떤 분류에도 해당하지 않았을뿐더러 해당될 수도 없는 그런 이익이 존재할 수는 없을까? 여러분, 내가 아는 한 당신들은 여태까지 통계표의 숫자와 경제학적 방식의 평균치 따위를 가지고 인간의 이익 대장을 꾸며왔던 것이다. 당신들이 말하는 이익이란, 행복이니 재산이니 자유니 안일 따위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이런 이익 대장을 무시하고 의식적으로 그에 역행하는 인간은, 당신들의 생각으로는 아니 내 생각으로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런 인간은 무지몽매한 고집쟁이든가, 아니면 진짜 미치광이로 보일 것이다. 이게 틀린 말인가?

  13. 여러분, 요컨대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사실 말이지, 거의 모든 사람에게 있어 최상의 이익보다 더욱 귀중한 그 무엇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다시 말해서 그 무엇보다도 유익한 이익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이것이 바로 좀전에 말한 바 있는, 대부분의 경우 빠뜨려먹기 일쑤인 이익으로 다른 어떤 이익보다 가장 귀중하고 고귀한 것이다. 이 이익을 위해서 사람들은 필요하다면 모든 법칙에 역행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즉, 이성도 명예도 안일도 행복도――한마디로 말해서 이런 모든 아름답고 유익한 것에 역행하는 한이 있더라도, 오직 자기에게 가장 귀중한 이 근본적이며 가장 진정한 이익을 획득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14. 사실, 이 정도라면 대수로울 건 없지만 반드시 동조자가 나타날 테니 그게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겨먹은 게 인간이니까. 이런 일은 입에 올릴 가치조차 없어보이는 부질없는 원인에서 생기는 법이다. 다름 아니라, 인간이란 언제 어디서든 이성이나 이익이 명령하는 것에 따르기보다는 하고 싶은 짓을 제멋대로 하고 싶어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설사 자기 자신의 이익에 반대되더라도 하고 싶은 걸 어쩌겠는가. 뿐만 아니라 천하없는 일이 있어도 꼭 그렇게 해야만 할 경우도 있다(이건 이미 나 자신의 생각이지만). 자기 자신의 자유로운 의욕, 아무리 엉뚱한 것일지라도 하여튼 자기 자신의 변덕, 미치광이 같은 것이라도 좋으니 하여튼 자기 자신의 공상――이것이야말로 세상 사람이 간과하고 있는 가장 유익한 이익이다. 이것만은 어떤 분류에도 속하지 않는 이익이며 또 이것 때문에 일체의 이론이 박살나 버리는 것이다. 저 현인이란 자들이 인간에겐 무언가 도덕적인 훌륭한 의욕이 필요하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 근거를 두고 계산해 낸 판단인가? 어째서 그들은 판에 박은 듯이, 인간에겐 반드시 합리적인 유익한 의욕이 필요하다는 따위 망상을 일으켰을까?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독자적인 자유로운 의욕뿐이다. 이 자유로운 의욕의 대가가 아무리 비싸더라도, 그리고 어떤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그런 건 문제가 아니다. 참으로 이 의욕만큼 처치 곤란한 것도 다시 없을 것이다.

  15. 그럼 여기서 당신들에게 묻거니와, 이런 기묘한 성질을 타고난 동물인 인간으로부터 대체 무엇을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한 번 시험삼아 지상의 온갖 행복을 인간의 머리 위에다가 한꺼번에 퍼부어, 행복 속에 풍덩 가라앉아버리게 하여, 그 행복의 표면에 물거품 같은 것이 꾸럭꾸럭 떠오르도록 해보라. 아니면, 인간에게 충분하고도 남을 만한 경제적 만족을 주어, 실컷 잠이나 자고 꿀떡이나 먹고 세계사의 영속이나 염려하는 따위 일밖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처지에 놓아보라. 그래도 인간은, 오직 배은망덕의 습성 때문에, 더러운 고집 때문에,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고야 말 것이다. 꿀떡이 주는 행복조차도 희생할 각오로 자기를 파멸시키는 비경제적이고 바보스런 넌센스를 기어이 원할 것이다. 그것도 다만 이 분별에 찬 질서정연한 세계에 파멸과 환상의 분자를 혼합시키고 싶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이와 같은 터무니없는 공상과 비천하기 짝이 없는 욕망을 언제까지나 잃지 않으려고 하는 게 인간인 것이다. 결국 그것은 인간이란 어디까지나 인간일 뿐, 피아노의 건반은 아니라는 걸 스스로 확인하고 싶은 데 지나지 않는다.

  16. 여러분,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상책이겠다! 의식적인 타성이 가장 좋겠다! 그러니까 지하생활 만세랄 수밖에! 나는 울화통이 터질 만큼이나 정상적인 인간이 부러워 죽겠다고 말은 했지만, 그러나 현재 내 눈으로 보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에 그들이 있는 한, 그들 축에 끼고 싶은 생각은 꿈에도 없다(그래도 역시 부러운 건 사실이지만…… 아니다, 아니야, 뭘로 보나 지하 세계 쪽이 훨씬 낫다!) 거기서는 적어도……. 제기랄, 나는 또 허튼 소리를 하고 있구나! 허튼 소리고말고! 왜냐하면 지하생활이 가장 좋은 건 절대 아니고, 내가 갈망하는 건 뭔가 전혀 다른 것이라는 걸 2×2는 4만큼이나 분명히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알긴 하면서도 좀처럼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지하생활 같은 건 귀신에게나 줘버려라!

  17. “그건 수치스럽고 비겁한 생각이다!” 아마 당신들은 멸시하듯 고개를 저으며 나한테 말할 것이다. “너는 생활에 굶주리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인생의 여러 문제를 혼란된 논리로 해결하려 하고 있다. 너의 얼토당토 않은 말투는 뻔뻔스럽고 건방지기 짝이 없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전전긍긍하고 있지 않느냐! 너는 바보스런 소리를 늘어놓는 것으로 자기 만족을 느끼고 있는 거다. 입으론 대담한 소릴 뇌까리고 있으면서도 줄곧 겁을 먹고 변명을 일삼고 있지 않느냐. 너는 아무것도 겁날 게 없다고 호언하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우리의 환심을 사려 하고 있다. 너는 이를 갈고 있다고 큰소리치면서도 한편으론 우리를 웃기려고 돼먹지 않는 농담을 늘어놓고 있다. 너 자신의 농담이 실은 농담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너는 그 문학적 가치에 사뭇 만족해하고 있지 않느냐. 너는 정말로 괴로움을 경험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자기의 그 고통을 눈곱만큼도 존경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 너라는 인간에겐 진실성은 있지만 순결성이 없다. 너는 하잘것없는 허영심에 사로잡혀 자기의 진실을 자랑하려고 시장 바닥에 전시함으로써 오히려 망신만 당하고 있다……. 뭔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서도 너는 두려움 때문에 그 마지막 한마디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너는 그걸 감히 입 밖에 낼 만한 결단력이 없는 겁쟁이이기 때문이다. 너는 자의식을 자랑하고 있으나 실은 갈팡질팡 망설이고 있을 뿐이다. 너의 내부에는 이성이 작용하고는 있지만 마음은 음탕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순결성이 없으면 올바른 의식도 있을 수 없다. 너는 참으로 처치 곤란한 인간이다. 너는 남에게 귀찮게 들러붙어 광대 노릇을 하려드는 인간이다! 허위, 허위, 모든 것이 허위다!”

  18. 그러니 당신들은 제발 그 구역질 날 만큼 싫증나는 똑같은 말――‘너는 그저 공상만 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이미 그때부터 현실 생활을 이해하고 있었다’라는 식의 상투적인 말로 나를 설교하지 않길 바란다. 그들은 현실 생활 같은 건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나를 무엇보다 분개시킨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현실을 옳게 이해하기는커녕, 한눈에 뻔히 알 수 있는 현실을 그들은 어이없을 만큼 곡해해서 받아들임으로써, 그때부터 이미 성공만을 기대하는 못된 버릇이 생겨버린 것이다. 아무리 올바른 것일지라도 학대받고 짓밟히고 있는 것은 무자비하게 냉소해 버렸다. 그들은 관등(官等)이 곧 지혜인 것처럼 생각했고 열여섯 살밖에 안 된 나이에 벌써부터 푹신한 자리를 공상하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천성의 우둔함과 유년 시대와 소년 시대를 통해서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좋지 못한 본보기가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들의 음탕함은 추악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거기에도 겉치레인 인위적 냉소주의가 더 강했고, 청춘과 신선함이 그 음탕 사이에서 반짝이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들의 경우 그 신선함도 마음을 끄는 힘이 없고 어딘지 모르게 시들한 것으로 나타났다.

  19. 나는 ‘안정’을 원했다. 지하의 세계에 혼자 남아 있기를 원했다. 너무나 오랫동안 떨어져 살아서 이제는 아주 생소해진 이 ‘현실 생활’이 숨막힐 듯 나를 압박했던 것이다.

  20. 그러나 미안하지만 나는 ‘모두들’이란 말을 변명의 도구로 사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 자신에 관해서만 말한다면, 나는 일생 동안 줄곧 당신들이 반도 추구할 용기가 없었던 것을 극단까지 추구한 것뿐이다. 당신들은 자신의 소심함을 분별력이라 생각하고 스스로를 기만하면서 그것으로 자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들에 비하면 오히려 내가 몇 배나 더 생기 있다고 할 수 있다. 눈을 좀더 크게 뜨고 잘 보라! 사실 지금 어디에 살아서 생활하는 것이 있는가? 그 살아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이며 뭐라고 불리우고 있는가? 그것조차 우리는 모르고 있잖은가? 가령 우리한테서 책이라는 걸 모조리 빼앗아보라. 우리는 곧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디에다 자신을 맞춰야 할지, 무엇에 기준을 두어야 할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미워해야 할지, 무엇을 존경하고 무엇을 경멸해야 할지, 모든 것이 캄캄해져 버릴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자기가 인간이라는 것조차――‘자기 자신’의 육체와 피를 가진 인간이라는 것조차 싫증이 나서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수치로 생각하면서, 뭔가 여태까지 없었던 일반적인 인간이 되려고 열심히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테면 생명 없는 사산아, 그것도 살아 있는 아버지한테서 태어난 것이 아닌, 몇 대에 걸친 사산아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점점 우리의 기호에 맞아가는 모양이다. 멀지 않은 장래에, 되도록이면 아버지 아닌 관념에서 인간이 태어나도록 궁리를 하게 될 것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만두기로 하자――나는 이제 ‘지하의 세계’에서 글을 쓰기가 싫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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