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세네카 (Anti-Sénèque) 또는 행복에 관한 담론 (Discours sur le bonheur)
사물의 원인을 알 수 있었던 자, 그리고 모든 공포와 무자비한 운명, 탐욕스러운 아케론의 비명 소리를 자신의 발아래 짓밟아 굴복시킨 자는 행복하도다! — 베르길리우스, 《농경시》 제2권 (Virg. Georg. L. II.)
철학자들이 행복에 대해 일치된 의견을 보이는 것은, 그들이 다른 모든 문제에서 그러하듯 전무하다. 어떤 이들은 행복을 가장 더럽고 뻔뻔스러운 것 속에 두는데, 결코 얼굴을 붉히는 법이 없는 저 파렴치한 키니코스학파(견유학파)의 이마를 보면 그들을 곧장 알아볼 수 있다. 또 다른 이들은 행복이 다양한 의미의 쾌락(volupté)에 있다고 본다. 때로 그것은 사랑의 정교한 쾌락이며, 때로는 동일한 쾌락이되 자극된 상상력의 방탕한 변덕이 아니라 오직 자연(신체)의 요구에만 종속된, 절제되고 이성적인 쾌락이다. 여기서는 진리를 탐구하는 데 몰두하거나 진리를 소유함에 매료된 정신의 쾌락이 행복이고, 저기서는 마침내 모든 우리 행동의 동기이자 목적인 정신의 만족이 행복이다. 에피쿠로스는 이 마지막 것에마저 '쾌락'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는 대단히 위험하고 모호한 명칭이었기에 그의 제자들이 이 위대한 인물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열매를 그 학파로부터 수확하는 결과를 낳았다. 어떤 이들은 최고선(soverain bien)이 정신과 신체의 모든 완전함에 있다고 보았다. 제논에게는 명예와 미덕이 최고선을 구성했다. 스토아학파 중 가장 명성 높은 세네카는 여기에 진리의 인식을 추가했으나, 그것이 정확히 어떤 진리인지는 명시하지 않았다.
평온하게, 야망 없이, 욕망 없이 사는 것. 부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용하는 것. 불안 없이 부를 보존하고, 미련 없이 부를 잃으며, 부의 노예가 되는 대신 부를 지배하는 것. 그 어떤 격정(passion)에도 동요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것, 아니 차라리 격정 자체를 품지 않는 것. 풍요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빈곤 속에서도 만족하는 것. 쾌락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고통 속에서도 만족하는 것. 나약하고 병든 신체 안에서 강인하고 건전한 영혼을 갖는 것. 두려움도 공포도 없는 것. 모든 불안을 떨쳐내고 기쁨과 쾌락을 경멸하는 것. 부유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쾌락을 얻는 것에 동의하되 그러한 즐거움을 굳이 찾아 구하지는 않는 것. 삶 자체를 경멸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진리의 인식을 통해 미덕에 이르는 것. 이것이 바로 세네카와 스토아학파 전반이 말하는 최고선이며, 그 뒤를 따르는 완벽한 지복(béatitude)이다.
우리가 얼마나 철저한 '안티-스토아주의자'가 될 것인가! 그 철학자들은 엄격하고, 음울하며, 가혹하다. 반면 우리는 부드럽고, 유쾌하며, 너그러울 것이다. 영혼 그 자체인 그들은 자신의 신체를 추상화(배제)한다. 신체 그 자체인 우리는 그들의 영혼을 추상화할 것이다. 그들은 쾌락과 고통에 초연한 척하지만, 우리는 그 두 가지를 모두 느끼는 것을 영광으로 삼을 것이다. 고결함을 향해 온 힘을 쥐어짜며 그들은 모든 사건의 상위로 치솟아 오르고, 인간이기를 멈출 때에야 비로소 스스로를 진짜 인간이라고 믿는다. 반면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는 것(신체적 조건)을 멋대로 처분하려 들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감각에 명령을 내리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감각의 통치와 우리의 예속 상태를 솔직히 인정하면서, 우리는 그 감각들을 우리에게 즐거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곳에 삶의 행복이 존재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더 인간다워질수록, 혹은 인간다운 가치를 지닐수록 우리가 더 행복하다고 믿을 것이다. 우리가 자연과 인류애, 그리고 모든 사회적 미덕을 느낄 때 말이다. 우리는 이 삶 외에 다른 미덕이나 다른 삶(사후세계)을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로부터 행복에 필수적인 진리들의 사슬이 헤게시아스나 데카르트, 그리고 수많은 다른 철학자들의 사슬보다 훨씬 더 짧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행복의 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오직 자연과 이성만을 참고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광신과 편견의 대기를 형성하는 저 독성이 있는 모든 미아스마(miasmes, 악취 나는 독기)에 영혼을 완전히 닫아걸고 이성무대의 광선을 받아들인다면, 자연과 이성이야말로 우리를 비추고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별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우리의 기관(장기)들은 우리를 기쁘게 하고 삶을 사랑하게 만드는 어떤 감정이나 변형을 받아들일 수 있다. 만약 이 감정의 인상이 짧다면 그것은 '기쁨(plaisir)'이다. 더 길다면 그것은 '쾌락(volupté)'이다. 영구적이라면 그것은 '행복(bonheur)'을 얻은 것이다. 이것은 언제나 동일한 감각이며, 오직 그 지속 기간과 강렬함(vivacité)에서만 차이가 날 뿐이다. 내가 강렬함이라는 단어를 덧붙인 이유는, 사랑이 주는 거대한 쾌락만큼 정묘하고 훌륭한 최고선은 없기 때문이다. 이 감정이 더 오래 지속되고, 감미로우며, 감동적이고, 전혀 중단되거나 방해받지 않을수록, 인간은 더 행복하다. 그것이 더 짧고 강렬할수록, 자연과 기쁨의 성격에 더 가깝다. 그것이 더 길고 평온할수록, 기쁨에서 멀어져 행복에 가까워진다. 영혼이 더 불안해하고, 동요하며, 괴로워할수록, 지복은 그로부터 멀어진다.
세네카가 말하듯 두려움도 욕망도 없는 상태는 '소극적(결핍적) 행복(bonheur privatif)'이니, 영혼이 마음의 평정을 해치는 것들로부터 면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왜 아무것도 욕망해서도, 두려워해서도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스토아주의자(세네카)가 함구하고 넘어간 이 이유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정신을 더 단단하고 흔들림 없게 만들어 준다. 하지만 두려워하는 것이 없기만 하다면야, 그것이 '기계의 힘(vertu de machine)' 덕분이든 '철학의 힘' 덕분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갖는 것, 즉 복받은 유기적 구조(organisation), 미(美), 정신, 우아함, 재능, 명예, 부, 건강, 즐거움, 영광을 누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실재적이고 완전한 행복(bonheur réel & parfait)'이다. 이 모든 명제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곧 타고난 안녕(well-being)의 감정을 생산하고, 유지하고, 양육하고, 자극하는 모든 것은 결과적으로 행복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으로 향하는 길을 열기 위해서는, 우리 몸의 유쾌한 (혈액) 순환을 가능하게 하고 그 순환을 통해 행복한 지각을 낳게 만드는 모든 원인을 규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원인들은 내부적 원인과 외부적 원인, 혹은 본질적 원인과 부수적 원인으로 나뉜다.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여겨지는 내부적 혹은 본질적 원인들은, 사실 전혀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신체의) 유기적 구조와 교육에 속하는 것들인데, 교육이란 말하자면 우리의 영혼을 굴복시키거나 우리의 신체 기관을 억눌러 온 것에 불과하다. 그 밖의 다른 원인들은 쾌락, 부, 학문, 관직, 명성 등에서 비롯된다. 신체의 유기적 구조에 좌우되는 행복은 가장 견고하며 흔들기 어렵다. 그것은 영양분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으니, 자연이 준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다. 같은 원천에서 비롯되는 불행은 치료법이 없으며, 고작해야 대단히 불확실한 몇 가지 일시 방편(대증요법)이 있을 뿐이다.
교육을 통한 행복은 그것이 우리에게 불어넣어 준, 그리고 거의 지워지지 않는 감정들을 따르는 데 있다. 영혼은 그 감정들에 기꺼이 이끌린다. 그 기울기는 완만하고 길은 잘 닦여 있어서, 여기에 저항하는 것은 영혼에게 격렬한 고통이다. 그러나 교육의 최고 걸작은 이 기울기를 극복하고, 어린 시절의 편견을 떨쳐버리며, 이성의 횃불로 영혼을 정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철학자들에게 허락된 행복이다. 자책감(remords)을 느낄 만한 행동을 전혀 하지 않음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는 점에는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 때문에 인간은 종종 즐거움을 주는 것, 자연이 요구하는 것을 스스로 금지하게 되며, 만약 그 자연의 목소리에 귀를 닫는다면 자연을 고통받게 만든다. 인간은 스스로 갈망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수천 가지 것들을 자제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교육과 사로잡힌 상상력이 낳은 '아이 같은 행복'에 불과하다. 반면,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그것을 맛보는 이들에게는 커다란 이로움을 주는 수천 가지 즐거움과 감미로움을 애써 외면하지 않는 것, 그리고 자기가 누린 즐거움을 후회하는 것이야말로 순전한 유치함임을 아는 것은 '실재적이고 적극적인 행복(bonheur réel ou positif)'을 가져다준다. 이는 그 어떤 자책감에 의해서도 더럽혀지지 않는 이성적인 지복이다.
인류를 파멸시키는 이 방해꾼들(죄책감과 편견)을 추방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명확히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이 무거운 짐을 덜어주는 것이 얼마나 유익하고 쉬운 일인지 보게 될 것이다. 사회의 체계가 만들어 낸 미덕들만으로도 사회의 유지와 안전, 그리고 행복에는 충분하다. 인간이 알아야 할 중요한 진리는 오직 단 하나뿐이며, 이 진리에 비하면 다른 모든 것들은 사소한 말장난이거나 다소 난해한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 자연과 이성에 기반을 둔 이 체계 안에서는, 무지한 자와 가난한 자도 학식 있는 자와 부유한 자만큼이나 행복해질 수 있다. 모든 계층을 위한 행복이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입견에 사로잡힌 정신들을 격분하게 만들 사실은, 이 행복이 선인들뿐만 아니라 악인들에게도 존재할 것이라는 점이다.
행복의 내부적 원인들은 인간에게 고유하고 개별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이질적인 외부적 원인들보다 반드시 우선권을 가져야 하며, 외부적 원인들은 그러한 이유로 이 책의 가장 짧은 분량이자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 느끼고 감각한다는 것은 그가 생기 있는 신체(body)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인간이 학식 있고 미덕을 갖추는 것은 화려한 옷을 입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래부터 타고나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진리, 미덕, 학문 등 배우는 것과 외부에서 오는 모든 것은 이미 교육을 받는 인간 내면에 감각(sentiment)이 형성되어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순수한 감각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의 지복을 이룰 수 없는지 검토한 후에야 비로소 명예, 부, 그리고 쾌락의 번뜩이는 이점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내가 방금 던진 의문의 진리성을 확신하는 이유는, 수많은 무지한 자들이 바로 그 무지함 자체와 편견 덕분에 행복하게 지내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에게는 가장 쓸모없는 진리를 발견했을 때 우리의 자애심(amour-propre)이 얻는 기쁨은 없을지라도, 모든 것은 보상된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진리들이 가져다주는 고통과 슬픔 역시 전혀 겪지 않기 때문이다. 지구가 도는지 태양이 도는지 그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자연의 운행에 당황하기는커녕 자연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고, 자신들을 인도하는 맹인의 지팡이를 짚고서 그들 자신의 작은 행보를 그저 원만하고 유쾌하게 이어갈 뿐이다. 그들은 기쁘게 먹고, 마시고, 자고, 식물처럼 살아간다(végetent).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기만당한 채, 어떠한 공포도 없이, 만약 정직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스스로를 위로해 줄 즐거운 생각들로 상상력을 채운다. 그들에게 약속된 보상이 비록 환상(chimérique)일지라도, 그 약속 덕분에 그들에게 상실이란 거의 실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충분히 행복한 자가 곧 충분히 유능한 자다.
이 주제를 더 깊이 파고들기 위해 몇 가지 성찰을 전개하는 것을 허락해 주길 바란다. 모든 조건이 대등할 때,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기쁨, 허영심, 분노, 우울함, 심지어 자책감에조차 더 취약하다. 이것이 대체 어디서 오겠는가? 광기, 백치미, 활발함, 둔함, 평온함, 통찰력 등을 만들어내는 '신체 기관들의 특수한 배치(disposition particuliere des organes)'가 아니라면 말이다. 이제 인간 신체 구조의 이 모든 효과 중에서, 나는 감히 '유기적 행복(bonheur organique)'을 분류해 넣고자 한다. 이 행복은 행복해지기 위해 오직 느끼기만 하면 되는 축복받은 필멸자들에게, 매일같이 이야기되는 저 축복받은 체질(tempérament)과 지복을 누리는 자들에게 주어졌다. 그들의 체질은 슬픔, 불행, 질병, 사소한 고통, 가장 소중한 사람의 상실 등 타인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그 모든 것들이 영혼 위를 미끄러져 지나가게 하며, 영혼에 거의 상처조차 남기지 않는다. 뛰어난 천재와 우둔한 정신을 만드는 것과 똑같은 우연한 결합, 똑같은 혈액 순환, 고체(조직)와 액체(체액)의 똑같은 상호작용이 우리를 행복하거나 불행하게 만드는 감각 역시 만들어낸다. 자연의 일관성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듯, 행복에는 이 외에 다른 원천이 없다. 여기에서 자연의 편애가 얼마나 두드러지는가! 이 정도로 자연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가장 아주 작은 필수품만으로도 만족하며, 자신이 풍요 속에서 헤엄쳤던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풍요 속에 빠져 죽을 뻔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만약 운이 돌아와 체질상 낭비벽이 생기더라도, 체질만으로도 행복하기에 충분할 때 그는 돈을 그저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여길 것이다. 모래가 그의 손가락 사이로 아주 쉽게 빠져나가듯 말이다. 반면 수전노는 자기를 훔치기 위해 도둑이 두 명 이상 잠입했다고 믿으며, 자기 금고가 절반밖에 차지 않았을 때 신음한다. 이토록 훌륭하게 구조화된 인간은 그 무엇도 흔들지 못한다. 고통 속에서도 가능한 한 인내하고 평온하기에, 고통은 그의 마음의 안정을 깨뜨리기 어렵다. 역경 속에서 그가 얼마나 단단한지 판단해 보라! 그는 자신이 슬퍼할 것이라 믿었던 운명이 얼마나 바보같이 속았는지 비웃는다. 그는 회의론자(Pyrrhonien)가 진리를 대하듯 운명을 가지고 논다. 나는 이처럼 행복한 기질을 지닌 이들이 때로는 건강할 때보다 아플 때, 부유할 때보다 가난할 때 더 좋은 기분을 유지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의 변화 역시 그것들이 명백히 종속되어 있는 신체 기관의 변화 탓으로 돌려야 한다. 질병은 매일 의사들의 눈앞에서 훨씬 더 놀라운 메타모르포시스(변형)를 만들어낸다. 질병은 똑똑한 인간을 결코 회복되지 못할 바보로 바꾸기도 하고, 바보를 불멸의 천재 수준으로 격상시키기도 한다. 자연에게 기괴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연을 고발하는 우리야말로 기괴할 뿐이다.
체질에 따른 행복이 존재한다는 것을, 수많은 똑똑한 이들이 불행해하는 동안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저 행복한 백치들보다 더 잘 증명해 주는 것은 없다. 정신(eſprit, 지성)은 감각에게 고문(torture)을 가하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동물들 역시 이 체계(시스템)를 뒷받침해 준다. 동물들은 건강하고 자신들의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그 만족에 결합되어 있는 유쾌한 감각을 맛보며, 따라서 그 종은 그들의 방식대로 행복하다. 세네카가 이를 부인하는 것은 부질없다. 그는 동물들에게 행복에 대한 '지적 인식'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삼는데, 마치 형이상학적 관념들이 안녕(bien-être)에 영향을 미치기라도 하고 성찰(réflexion)이 행복에 필수적이기라도 한 것처럼 군다. 동물보다 성찰을 덜 한다고 의심받는 수많은 우둔한 인간들이 완벽하게 행복하지 않은가! 성찰은 감각을 증폭시킬 뿐이지, 쾌락이 기쁨을 낳지 못하는 것처럼 감각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아! 과연 이 성찰이라는 능력에 찬사를 보내야 하단 말인가? 그것은 매일 찾아와 말하자면 너무나 거꾸로 작동하는 바람에, 감각을 짓밟고 모든 것을 찢어발긴다. 물론 성찰을 통해 행복해질 때, 그리고 성찰이 감각의 정방향 흐름과 일치할 때는 더 행복해진다는 것을 나도 안다. 감각이 일종의 이러한 자극(aiguillon)에 의해 흥분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의 경우에 있어서, 내가 보통 이해하는 의미로 볼 때 성찰만큼 더 잔인하고 치명적인 권리가 어디 있겠는가! 그것은 삶의 독약이다. 성찰은 종종 거의 자책감과 같다. 반면, 본능 덕분에 만족하는 인간은 어떻게 왜 그런지도 모른 채 언제나 만족하며, 아주 적은 비용으로 행복을 누린다. 이 '기계(인간)'를 만드는 데는 동물의 기계를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지 않았다. 반면, 그 행복을 위해 운명, 명성, 사랑, 그리고 자연이 헛되이 고갈되어 버린 무수히 많은 다른 기계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도 불행한데, 왜냐하면 불안하고, 조급하며, 인색하고, 질투심 많고, 오만하며, 수천 가지 격정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감각이 오직 자신들을 괴롭히기 위해서만 주어졌거나, 그들의 지성이 오직 자신들의 감각을 고문하고 타락시키기 위해서만 생겨났다고 말해야 할 지경이다. 새로운 증거들로 우리의 생각을 확인해 보자.
어떤 치료제(약물)들 역시 내가 유기적, 자동적(machinal), 혹은 자연적 행복이라 부르는 것의 증거가 되지 않는가? 왜냐하면 거기에는 영혼이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으며, 그것이 영혼의 의지와는 독립되어 있기에 영혼은 아무런 공로도 가져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피움(아편)이 선사하는 저 부드럽고 평온한 상태를 말하고자 한다. 만약 그것이 영구적일 수만 있다면 영원히 머물고 싶을, 영혼의 진정한 파라다이스 말이다. 그러나 이 복된 상태는 평화롭고 균등한 혈액 순환과, 고체 섬유 조직의 부드럽고 절반쯤 마비된 듯한 이완 외에 다른 기원을 두고 있지 않다. 혈액에 첨가되어 혈관 속을 피와 함께 흐르는 단 한 알의 마취성 즙(juice)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가! 그것은 어떤 마술로 철학자들의 그 어떤 논문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행복을 전달해 주는가? 그리고 만약 이 신성한 약물이 작용하는 동안만큼은, 평생 그렇게 조직(organisé)되어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의 운명은 어떠하겠는가! 그는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꿈 역시 종종 매우 유쾌하기 위해 굳이 아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같은 사실을 확인해 준다. 사랑하는 대상은 눈앞에 있을 때보다 없을 때 더 잘 그려지는데, 왜냐하면 현실은 상상력에게 한계를 제공하지만 상상력이 스스로에게 버려졌을 때는 그 한계를 더 이상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이유로 우리가 잘 때의 그림들이 깨어있을 때보다 더 생생하다. 그때는 그 무엇도 방해하지 않기에, 오직 감각들의 내부적 동요에 완전히 내맡겨진 영혼은 자신을 관통하는 즐거움들을 더 잘, 더 깊이 들이킨다. 역으로 밤사이에 뇌 속에서 형성되는 유령들에 의해서 영혼은 더 놀라고 더 공포에 질리기도 한다. 깨어있을 때는 외부의 사물들이 그것들을 곧 쫓아내 버리기 때문에 결코 그토록 끔찍하지 않다. 이러한 검은 꿈(악몽)들은 낮 동안에 슬프고 음울하거나 불길한 생각들을 쫓아내려 노력하기는커녕 오직 그런 생각들에만 길들여진 자들에게 주로 찾아온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편지에서 밤에 낮보다 더 괴로운 생각을 품지 않는 것을 축하하기도 했다.
보라, 약물에 의해서든 꿈에 의해서든 유도된 '환상(illusion)'조차 우리 기계적(machinal) 행복이나 불행의 실재적인 원인이다. 그리하여 만약 나에게 밤에 불행하고 낮에 행복할 것인지 선택하라고 한다면 그 선택은 나를 당황스럽게 할 것이다. 내가 불만족스럽고, 불안하고, 슬프고, 황량할 때 내 신체가 어떤 상태에 있든 나에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만약 가위(incube)에 눌렸을 때 내 가슴 위에 물리적인 짐이 없을지라도, 내 영혼이 악몽을 겪지 않는단 말인가? 그리고 나에게 감미로운 꿈을 제공하는 저 매력적인 대상들이 나와 함께 있지 않을지라도, 나는 여전히 그들과 함께 있으며, 그들이 실제로 있는 것과 다름없는 똑같은 기쁨을 느끼지 않는단 말인가. 헛소리(délire)와 광기 속에서도 똑같은 이점을 누리며, 광기 역시 그중 하나다. 종종 이러한 질병들을 치료하는 것은 나쁜 서비스를 제공하는 꼴이 된다. 그것은 유쾌한 꿈을 방해하는 것이며, 오직 부와 자신에게 속한 함선들만을 보던 사람에게 빈곤이라는 슬픈 전망을 들이미는 꼴이기 때문이다. 건강하든 병들었든, 깨어있든 잠들어있든, 상상력은 이처럼 인간을 만족스럽게 만들 수 있다.
우리를 즐겁게 하거나 불쾌하게 만드는 감정(Le sentiment)은 삶의 쾌락이나 불쾌함을 만들어내기 위해 굳의 외부 감각의 작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부 감각(les sens internes)이 어느 정도 열려 있거나 깨어나, 그 감정을 억누르지 않은 채 관념들의 혼돈 속에 내맡기기만 하면 충분하다. 그리하여 말하자면 우리 영혼에게 희극이나 비극을, 즉 희열이나 고통의 감각들을 상연해 주는 것으로 족한 것이다. 하지만 깨어 있는 상태(la veille)라는 것 자체가, 그저 조금 덜 혼란스럽고 더 잘 정돈된 꿈에 불과한 것이 아님이 정말 확실한가? 그것이 우리가 처음 받아들인 관념들의 자연스러움과 질서에 더 부합한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인간의 이성은 우리를 그토록 자주 속이고, 몽테뉴가 말했듯 이성이 원하는 바를 의지 스스로 원하게끔 만들 능력조차 없는데, 과연 이성이 언제나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동물 경제(l'économie animale, 생체 유기체의 역학 구조)에 대해 약간의 지식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의심할 여지없이 알다시피, 수많은 꿈이 불안전하게 깨어 있는 상태(veilles imparfaites)라면, 거꾸로 수많은 깨어 있는 상태 역시 불완전한 꿈(songes incomplets)에 불과하다는 것은 반박할 여지가 없다. 사람은 잠들었을 때나 깨어 있을 때나 자주 사유하며, 때로는 잠들었을 때 더 잘 사유하기도 한다. 어떤 바보들은 꿈속에서 엄청난 재치를 발휘한다. 설교가는 웅변을 토하고, 시인은 시를 지으니, 이때의 모르페우스(꿈의 신)는 아폴론(예술의 신) 못지않다. 이것이 바로 사유하는 습관이 가진 힘이다. 하지만 깨어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깊은 공상(rêve)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는데, 만약 이 상태가 한 세기 동안 지속된다면 사람은 아무것도 상상하지 못한 채 한 세기를 보낸 셈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귀를 쫑긋 세울 때만 타인의 말을 듣는 저 개들과 같다. 유사한 관념들이나 늘 함께 다니던 관념들을 결합해 주는 '주의 집중(l'attention)'이 없다면, 관념들은 뒤죽박죽 걸어가고 너무나 빠르고 가볍게 질주하므로, 우리는 그것을 분간하기는커녕 느끼지도 못한다. 이는 잠이 너무 깊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꿈들과도 같다. 이것이 바로 감각(les sensations)의 지배력이다. 감각은 결코 우리를 속일 수 없으며, 환상의 한복판에서조차 우리를 기준으로 볼 때 결코 거짓이 아니다. 왜냐하면 감각은 우리가 그것을 겪는 바로 그 순간, 현재의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슬프든 기쁘든, 만족하든 불만족하든, 그것은 감각이 지각 능력(sensitif)을 가진 우리의 온 존재에 영향을 미치거나, 차라리 우리 존재 자체를 구성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삶이 꿈이든 아니면 어떤 현실성이 있든 간에, 웰빙(bien-être, 안녕)과 불행(mal-être)의 관점에서 보면 그 결과는 완전히 동일하다. 데카르트의 주장과 반대로, 불만족스러운 현실은 폰테넬이 그의 《목가(églogues)》에서 말한 저 매혹적인 환상들 중 단 하나만큼의 가치도 없다. 인색한 자연이 인간에게 허락하지 않은 진짜 좋은 것들의 결핍을 보상해 주는 것이 바로 이 환상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자연이 우리의 이익을 위해 우리를 속이는 것이라면, 자연이 우리를 영원히 속이게 내버려 두라. 만약 우리가 더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이성 그 자체를 사용해서라도 기꺼이 길을 잃자. 행복을 발견한 사람은 모든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행복을 발견한 사람은 결코 행복을 찾아 헤매지 않았다. 자신이 이미 가진 것을 찾아 헤매는 사람은 없으며, 만약 지금 가지고 있지 않다면 앞으로도 결코 가지지 못할 것이다. 철학은 자신이 자연에 빚진 장점들을 요란하게 떠들어댄다. 세네카는 심지어 행복에 관해 글을 쓰면서도 스스로 불행했다. 그가 스토아주의자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스토아주의자는 나병 환자만큼이나 감각(sentiment)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의 또 다른 결론은 이것이다. 정신(l'esprit), 지식(le savoir), 이성(la raison)은 행복에 있어서 대부분 무용하며, 때로는 치명적이고 파멸적이기까지 하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영혼에게 없어도 그만인 이질적인 장식품에 불과하다. 지식과 이성을 갖지 못한 절대다수의 인간을 보면, 그들은 그것들을 갖지 못한 것에 대해 완전히 위안을 얻고 있으며 오히려 그것들을 경멸하고 무시하곤 한다. 그들은 그저 느끼는 즐거움(plaisir de sentir)에 만족할 뿐, 사유한다는 피로한 노동(fatigant métier de penser)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는다. 행복은 감각(le sentiment)에 의해 온전히 활력을 얻고, 온전히 완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자연은 이로써 모든 인간에게 행복에 대한 동일한 권리와 동일한 권리 주장을 부여함으로써, 그들 모두를 삶에 밀착시키고 자신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는 이성에 기댈 여지가 전무하며, (만약 행복이 진리에 좌우된다면) 우리 모두가 마치 환자가 파리나 나비를 쫓듯 각기 다른 길을 통해 상상 속의 행복만을 쫓아 달리고 있다는 뜻인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이성이 우리를 속인다면, 그것은 이성이 스스로라기보다 자신의 편견에 의해 우리를 이끌고자 할 때뿐이다. 하지만 이성의 인도자가 '자연'일 때, 이성은 훌륭한 길잡이가 된다. 그때 경험과 관찰이 횃불을 밝혀 준다면, 사람은 천 개의 통로와 천 개의 입구가 있으되 출구는 간신히 하나뿐인 이 모호한 길, 이 뒤틀린 미로이자 인간의 미궁 속을 확고한 발걸음으로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길을 잃지는 않을 것이며, 편견의 잔해 위로 자신의 행복의 한 부분을 쌓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종류의 행복 중에서, 나는 우리의 신체 기관과 함께 발달하며 모든 유기체(animaés) 안에서 마치 '힘(체력)'처럼 다소나마 발견되는 종류의 행복을 선호한다. 나는 사기극의 속아 넘어가는 바보가 될 만큼 허영심(자애심)이 크지 않다. 그러나 신체의 유기적 구조가 비록 최고로 훌륭한 만듦새가 아닐지라도, 교육을 통해 교정될 수 있으며, 그 교육이라는 원천으로부터 신체 자체가 본래 지니지 못한 성질들을 획득할 수 있다. 만약 체질이 보잘것없다 할지라도, 좋은 체질이 교육으로 더 좋아지듯 나쁜 체질 역시 교육을 통해 덜 나빠지기를 기대해야 한다. 이질적인(외부적인) 가치를 결코 소홀히 하지 말자. 그것은 우리에게 풍요롭게 주어지지 않은 자연적 기질을 보완해 주며, 못생긴 여성에게 지성이 그러하듯 우리 신체 기관의 결함을 감소시켜 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결한 체계에 따라, 우리는 언제나 완벽함을 지향해야 한다. 모든 조건이 대등하다면, 더 많은 지혜의 빛을 가진 학자가 무지한 자보다 더 행복할 것이라는 점은 참이지 않은가?
이처럼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안녕(well-being)과 커다란 연관을 맺고 있는 만큼, 우리의 교육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자. 지구를 덮고 있는 저 쓸모없는 수많은 식물들만큼이나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은, 하나 혹은 수천 개의 메마른 진리들을 아는 것조차 이미 하나의 완성이다. 하지만 그 진리가 정신의 모든 불안을 해소해 주고 오직 충족시키기 훨씬 수월한 신체의 불안만을 남겨둠으로써 우리 영혼을 평온하게 해줄 수 있다면, 그것은 크나큰 행복이다. 영혼의 평온함(La tranquillité de l'ame), 이것이야말로 현명한 인간의 목표이다. 세네카는 이를 너무나 귀하게 여겼기에 이에 관해 의도적으로 긴 논문(《마음의 평정치에 관하여》)을 집필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 감미로운 휴식을 가져다줄 수 있는 모든 일을 행하고, 타인에게도 이를 안겨주기 위해 노력하자. 회의론자(Pyrrhoniens)들의 면전에서 큰 목소리로 선언하자. 그리고 세네카가 우리에게 마침내 전해 준 행복에 대한 숭고한[1] 정의 속에서, 그가 은폐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우리가 복원해 내자. 그렇다, 여기 지극히 유익하고도 강렬한 진리가 있으니, 곧 우리를 낳아 준 '자연의 품'이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가 온 곳으로 반드시 돌아가야만 한다. 만약 세네카가 이 위대한 진리(그의 저작 곳곳에서 명백하고 결코 모호하지 않은 흔적들로 발견되는)를 가슴 깊이 품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는 불행한 자들뿐만 아니라 쾌락에 깊이 빠진 자들에게도, 만약 그 쾌락에서 달리 빠져나올 길이 없다면 죽음을 권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세네카가 루크레티우스처럼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할 때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고, 죽음이 존재할 때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가장 먼 과거부터 우리 존재의 완전한 파멸(l'entiere destruction)이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흔한 진리였기에, 스토아주의자로서는 이 점에 대해 굳이 사람들의 정신을 안심시키는 일을 생략하거나 경멸하며 넘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우리 영혼이 불멸한다고 믿기 시작한 최초의 인물이 누구였는지 그 이름을 지명해 준다.
우리의 명성 높은 스토아주의자가 미래(사후세계)에 대해 우리의 정신을 평온하게 만들어 줌으로써, 과연 어떤 진리가 삶의 행복에 중요한지 명확히 말했더라면 아마 더 좋았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데카르트가 세네카의 침묵에 대해 아무런 해석도 내리지 않음으로써 그의 침묵을 잘못 해석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침묵을 명확히 설명해 낸 나는 그를 정당화(대변)해 준 셈인가? 어찌 되었든, 자연이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서 더 이상 자연에 대해 바랄 것이 없을 만큼 계몽된 우리 세기(18세기)에는, 오직 단 한 번의 삶과 단 한 번의 행복만이 존재한다는 것이 수천 가지의 반박 불가능한 증거로 마침내 증명되었다. 행복의 첫 번째 조건은 느끼는 것(감각하는 것)이며, 죽음은 우리에게서 모든 감각을 앗아간다. 거짓된 철학은 신학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약속할 수 있으며, 감미로운 환상으로 우리를 달래며 우리의 나날들이나 우리의 즐거움을 대가로 지불하게 하면서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할 수 있다. 이와는 너무나 다르고 훨씬 현명한 '참된 철학'은 오직 유한한 시간 속의 행복(félicité temporelle)만을 인정하며, 우리의 발걸음 위에 장미와 꽃을 뿌려주고 우리에게 그것들을 꺾는 법을 가르쳐 준다. 이것이 바로 지혜가 스스로를 가두고 자신의 염원과 욕망을 제한할 줄 아는 정당한 한계선이다.
나도 데카르트가 '영혼의 불멸성'이야말로 미덕의 실천과 행복으로 가는 길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 그 인식이 요구되는 진리 중 하나라고 말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때 그는 철학자로서 말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스스로도 최고선이 자기가 다루기 좋아하는 주제가 아님을 인정했듯이, 저자의 신중함은 그 주제가 가진 민감함에 비례해 있었음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편지들이 출판되는 것을 두려워했을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맹목적이고 전제적인 의견에 감히 맞서는 모든 이를 파멸시키기 위해 오직 잔인한 기회만을 엿보던 저 선량한 기독교인들을 두려워했을 수 있다. 그의 훌륭한 편지들을 읽어보라. 건전한 신학이 그 위대한 사람에게 겪게 만든 그 모든 불안과 슬픔을, 그리고 그 위대한 사람이 자신의 철학을 확립하지 못하도록 신학이 얼마나 온갖 수단을 동원해 뒤흔들었는지를 보라. 비록 그의 철학이 온통 가설적일지라도, 인류의 정신은 앞으로 실험을 통해 이룩할 모든 진보를 바로 데카르트가 그 필요성을 절감하게 만든 저 철학에 빚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동물을 순전한 기계로 간주하면서, 언젠가 더 평범하면서도 대담한 천재들에 의해 인간 역시 동물과 비교되리라는 것을 분명 상상했을 그의 본모습이 마침내 드러나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의 불멸성에 대해서는 헤게시아스의 거짓 철학 외에는 그 어떤 확증도 없다고 그가 말할 때이다. 이것은 데카르트 자신의 표현이다. 그는 헤게시아스의 책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에 의해 금지되었다고 덧붙이는데, 왜냐하면 헤게시아스가 과장해 놓은 이 삶의 비참함에 싫증이 난 많은 이들이 책을 읽은 후 자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기보다, 헤게시아스가 독자들을 유혹했던 저 사후세계의 영원한 행복을 서둘러 맛보기 위해 목숨을 끊었다. 이 사실은 다음을 보여준다.
- 여러 세기에 걸쳐 때로는 환영받고 때로는 거부당하는 의견들의 유행.
- 사람들이 가장 도덕적이고 가장 신성하며, 삶의 고통 속에서 인류를 지탱해 주고 심지어 아름다운 희망만으로도 우리를 행복하고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믿는 저 의견들이 품고 있는 위험성. 나는 독서를 통해 일반적으로 최고의 지성이라 인정받는 이들이 두 상반된 의견이 가져다주는 이점들을 결코 동일한 저울 위에 올려놓고 평가하지 않았음을 본다. 세네카에 따르면, 미래의 일들을 두고 불안해하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정신만큼 비참하고 동정할 가치가 없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 일들이 자신의 욕망대로 흘러갈 것이라는 확실성이 전혀 없기에, 욕망과 완전히 정반대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인간은 끊임없이 얼마나 끔찍한 불확실성에 내맡겨지겠는가? 하나의 즐거운 생각 뒤에, 얼마나 많은 슬픈 생각과 잔인한 공포가 뒤따르겠는가! 반면 우리의 의견(필멸론) 안에서는, 비록 멋진 꿈이 주는 환상 속의 장미는 얻지 못할지라도, 최소한 그 꿈에 동반되는 실제적인 가시들로부터는 면제된다. 결코, 모든 것을 숙고해 볼 때, 오직 우리 권한 안에만 있는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현자의 면모에 걸맞은 선택이다. 이 체계 안에서는 미래에 대한 그 어떤 불편함도, 그 어떤 불안도 없다. 오직 삶의 좁은 원을 잘 채우는 데만 전념함으로써, 인간은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왕을 위해, 그리고 전반적으로 자신이 기꺼이 봉사하고자 하는 인류를 위해 살아가기에 그만큼 더 행복해진다. 인간은 자신의 행복과 함께 사회의 행복을 만들어낸다. 모든 미덕은 사회에 이바지하는 데 있으며, 이에 대해 이제 설명하고자 한다.
다른 이들은 스토아주의의 날개(그것이 아직 남아있기라도 하다면)를 타고 저 가파른 바위 꼭대기까지 솟아오르라지. 헤시오도스가 미덕을 위해 그곳에 세운 숭고한 신전으로 말이다. 그 길을 빼곡히 채운 가시나무에 찔리면서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고, 언제나 절벽 가장자리를 걸으면서도 떨어지지 않는 척하면서 말이다. 그들은 이카루스가 자신이 추락한 바다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듯, 어떤 학파에 이름을 남길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자연(la nature)으로부터 멀어질수록—자연이 없다면 도덕과 철학은 똑같이 기괴할 뿐이다—그들은 미덕으로부터도 멀어질 것이다. 미덕은 철학자들만을 위해 예속된 것이 아니다. 모든 학파의 당파성, 모든 종파, 모든 광신은 미덕에 등을 돌린다. 미덕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졌거나, 차라리 가르쳐졌다. 우리는 그저 인간이 되기만 하자, 그러면 우리는 vertueux(도덕적/미덕을 갖춘 자)가 될 것이다. 우리 자신 내부로 돌아가자, 그러면 우리는 그곳에서 미덕을 발견할 것이다. 미덕은 저 정체 모를 신전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이 알지도 못하는 이른바 어떤 '자연법' 같은 것이 아니라, 인간들 중 가장 현명한 이들이 인간의 마음에 새겨 넣고 가장 유용한 토대를 닦아놓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악하게 태어난다. 교육이 없다면 선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며, 교육이라는 구원이 있다 하더라도 악한 자가 선한 자보다 훨씬 많다. 이것이 바로 인간 구조(conformation, 신체적·유기적 조직)가 가진 결함이다. 따라서 오직 교육만이 유기적 구조(l'organisation)를 개선해 왔으며, 인간을 다른 인간들의 이익과 이점에 부합하도록 돌려놓은 것도 바로 교육이다. 교육은 인간을 마치 시계처럼 가장 유용한 도에 맞추어, 쓸모 있는 상태로 태엽을 감아 놓았다. 이것이 바로 미덕(la vertu)의 기원이다. 공공의 이익(le bien public)이 그 원천인 것이다. 한 철학자의 말을 들어보자. "왕들에게는 왕들만의 미덕과 정의가 있다. 그것들은 사적인 개인들의 미덕과는 다른 한계를 지닌다. 신은 언제나 힘(권력)을 준 곳에 권리를 부여하셨다. 외견상 가장 불의해 보이는 방법도 군주가 그렇다고 믿으면 정의로운 것이 되며, 정의로워 보이는 방법도 군주가 스스로 불의를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하면 불의가 된다. 의도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내가 잘 기억하고 있다면,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의 편지에서 읽은 내용의 대강이다. 만약 이 신들의 모사(模寫, 지상의 왕들)로부터 신들 자체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우리는 그들의 정의와 그들이 내린 법령의 견고함에 대해 거창한 관념을 갖게 될 것이다. 반대로 거기서부터 신들이나 왕들의 명을 아무런 의문 없이 맹목적으로 따르며 아무것도 검토하지 않는 인민들의 모습으로 내려온다면, 우리는 이에 대해 대체 무슨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만약 각자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홀로 살아갈 수 있었다면, '인간들'은 존재했을지언정 '인류(humanité)'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악덕(혹은 악덕이라 불리는 것)은 존재했을지언정 양심의 가책(remords)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난잡하게 떠도는 욕망의 교류만을 나누는 동물들 사이에는 —이 단어를 다소 거친 의미로 사용하자면— '동물성(animalité, 유대감이나 사회적 질서)'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삶의 관계(사회적 유대)에 대한 필요성이야말로 미덕과 악덕의 정립을 가져온 원인이었으며, 그러므로 그 기원은 '정치적 제도(institution politique)'에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미덕과 악덕이라는, 비록 가상일지라도 견고한 토대가 없었다면 사회라는 건축물은 유지되지 못하고 파멸하여 무너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바라본 미덕에 대해, 제논이 악덕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모든 미덕은 대등하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명예와 영광이라는 매혹적인 환상들이 미덕을 자극하고 호위하기 위한 수행원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었을 뿐이다. 반대로 경멸, 치욕, 두려움, 오명, 양심의 가책은 악덕을 뒤쫓고 겁주며 그들을 괴롭히는 복수의 여신 역할을 하도록 악덕에 들러붙게 되었다. 결국 사람들은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그 감각(sentiment)을 이용한 것이니, 본질적으로는 허상(chimere)에 불과한 것이 관계 속에서는 하나의 '실재하는 선'이 된다. (단, 아름다운 행위가 은밀하게 행해질 때조차 뒤따르는 '자애심[amor-propre, 인정욕구]'은 예외로 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 행위가 대중에게 공개될 때 자애심은 한층 더 감복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명예, 영광, 평판, 명성, 존경, 배려 등의 용어들이란 결국 우리에게 우호적이고 우리를 기쁘게 만드는 '타인의 평가'만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회적 합의(la convention)와 임의로 매겨진 가치(un prix arbitraire)가 악덕과 미덕이라 불리는 것의 모든 가치와 불명예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비록 본질적 의미의 미덕, 혹은 '절대적 미덕'이란 존재하지 않고 이 단어 역시 수많은 다른 단어들처럼 허망한 소리에 불과할지라도, 사회에 '상대적인 미덕'은 존재하며, 그것은 사회의 장식이자 버팀목이 된다. 이 상대적 미덕을 가장 높은 수준으로 소유한 자는 미덕에 속한 종류의 행복을 가장 크게 누리는 자이다. 반면 이를 소홀히 하고 타인에게 유용한 존재가 되는 즐거움을 모르는 자들은 이러한 종류의 안녕을 박탈당한다. 하지만 자연은 그 자체로 너무나 자족적이기에, 타인을 위해 살지 않는 자들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만족감, 즉 스스로에게 부모가 되고 친구가 되며 연인이자 온 우주가 되어주는 만족감으로 보상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자들은 삶 속에서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낄 때, 자신의 삶이 가족에게 유용하다는 이유만으로 삶을 보존하려 들지 않을 것이며, 내가 목격했듯 가장 비장한 야심을 품고 죽음을 찾아 나설 것이다. 품격 있게 태어난 인간들의 눈에, 인간의 행복은 나눔과 소통을 통해 증폭된다. 사람은 자신이 베푼 선행을 통해 일종의 부를 얻으며, 자신이 자아낸 기쁨에 동참하게 된다. 인간이 그렇게 설계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인간의 품격에 걸맞은 일이다. 미덕이 그저 영혼의 아름다움으로 남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 아름다움을 사용하도록 자극하기 위해서는, 영혼이 스스로 아름답다는 사실에 쭐쭐대고, 무엇보다 타인에게 아름답게 '보여 인정받는 것'에 기쁨을 느껴야만 했다. 마치 예쁜 여성이 자신의 매력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스스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 뒤에 따르는 허영심과 희열 때문에 타인의 찬사와 사랑의 손길을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다. 차라리 "내가 덜 매력적이더라도 나에게 찬사를 건네줄 누군가를 만나는 편이 낫겠다"라고 말한 알키비아데스의 저 요염한 여인처럼 말이다. 여성이 못생겼다 한들 예쁘다고 통하면 그만이고, 남자가 어리석다 한들 지혜롭다고 통하면 그만이며, 악한 자가 미덕이 있다고 통하면 그만이 아닌가? 남녀 간의 연애에서도 언제나 신중함과 치밀함만 있으면 충분하며, 의심은 덜 사고 실속은 더 챙기는 편이 낫다고 매일같이 말하지 않는가? 인간은 자기 자신의 생각만큼이나 '타인의 평판(opinion d'autrui)'에 의해서도 행복해진다. 허영심(La vanité)은 가장 정당하고 잘 조절된 자애심보다 인간에게 더 많은 유익을 가져다준다. 자신의 가치를 서점 주인의 저울(책 판매량) 위에 올려놓고 평가하는 저 수많은 삼류 작가들에게 물어보라. 미덕을 의인화해 보자. 명예는 미덕이 손가락에 끼고 있는 다이아몬드 반지다. 천박한 구혼자들아, 너희가 사랑하는 것은 미덕 그 자체가 아니라 그녀가 가진 보석이다. 거친 검증의 체를 거치지 않고 그 보석만을 차지하고 싶어 하며, 실제로 그러한 행운은 가장 자격 없는 자들에게 너무나 자주 일어난다. 미덕이란 귀에 걸린 귀걸이의 광택이나, 어떻게든 따내야 할 그녀의 돈 때문에 구혼을 받는 '못생긴 노파'에 불과하다. 현자의 여왕이자, 탁월한 미인이며, 스토아주의의 여신이라는 자의 매력이란 고작 이런 것이다! 내 저자가 나에게 비유를 들고 싶은 흥미를 돋워 주니, 미덕을 한 가지 더 비유해 보겠다. (신이시여, 저자가 가끔 써먹는 저토록 진지하게 우스꽝스러운[2] 비유를 제가 정색하고 따라 하지 않도록 보살펴 주소서.) 미덕은 사람들이 평소에는 거의 신경 쓰지 않고 바라보지도 않다가, 오직 그것이 주는 '그늘(l'ombre)' 때문에 찾아 헤매는 '나무'와 같다. 그런데 이 그늘은 참 기묘해서, 그것을 만들어내는 몸체(나무)와 일치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바람이 앞에서 부느냐 뒤에서 부느냐에 따라 그늘이 수축하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면서, 때로는 너무 크고 때로는 너무 작아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는 미덕에 있어서 대부분 속물적인 한량(petits maîtres)에 불과하다. 미덕이 우리에게 베푸는 은혜도 소문이 나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 거의 그 누구도 이름 없고 묻혀 있는 무명의 가치를 원치 않는다. 모두가 영광(la gloire)을 위해 행동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광을 외적 선(善) 중 으뜸으로 여겼고, 호라티우스는 숨겨진 미덕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키케로 역시 감히 용기를 낼 수만 있었다면 똑같이 말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웅변만큼이나 자신의 미덕을 요란하게 떠들어댔는데, 왜 그토록 갈구하던 '영광'을 거두어들이기 위해서였다. 과시되지 않는 미덕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선 그 자체를 위해 자신의 재산까지 희생해가며 선을 행하는 카르네아데스 같은 사람은 거의 없다. 미덕이 숨겨져 있을수록 더 가치 있게 여기고, 이미 세상에 소문이 났다는 이유로 그 가치를 덜하게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카르네아데스는 세상의 모든 영광을 얻기 위해서라면 손가락 하나조차 까딱하지 않았을 크리시포스나 디오게네스와 정반대 학파의 수장이었지만, 모든 것을 잘 따져보면 그 역시 이 철학자들 못지않게 영광을 경멸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말하는 영광이란 인간들의 찬사에서 오는 '헛된 영광'을 뜻한다. 만약 인류를 가장 아름다운 행위로 인도하는 열정을 감히 헛되다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카르네아데스는 영광과 미덕을 혼동하지 않았고, 미덕 그 자체 외에 다른 목적을 위해 미덕을 행하는 즐거움을 경멸했기에 진짜 가치를 완벽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것이 자애심의 세련된 변형이며, 허영심을 경멸하는 태도 자체가 자애심의 과잉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지라도 (실제로 겸손은 종종 변장한 오만인 경우가 많다), 나는 이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허영심 속에서 미덕의 완전함과 영웅주의의 가장 고결한 원천을 발견한다. 자애심이 쳐놓은 덫 때문에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일이지만, 타인에게 경멸을 받을 때조차 스스로를 존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행복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soi)으로부터 와야 한다. 백 개의 입을 가진 여신(소문/명성)을 수하에 두고, 그 입들을 침묵시키며, 입을 열지 못하도록 명하고, 그들이 바치는 향불을 경멸하며, 스스로가 스스로의 명성이 되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자신이 홀로 자신의 도시 전체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그 도시 전체가 자신을 존중해 줄 수 있는 만큼 스스로를 존중하고 아낄 수 있으며, 그 기만적인 수많은 박수갈채를 경멸한다 한들 아무것도 잃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대부분의 찬사에 무슨 대단한 감동이 있기에 그토록 악착같이 구걸한단 말인가? 찬사를 남발하는 자들은 애초에 찬사를 줄 자격조차 없는 자들이기에, 그들의 말은 귀담아들을 가치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탁월한 가치를 지닌 인간은, 위대한 왕이 자신을 찬양하기 위해 지어진 엉터리 시를 읽듯 그 찬사들을 마지못해 들어줄 의무가 있을 뿐이다.
사회적 미덕들의 작은 그림을 그려보는 것을 허락해주기 바란다. 사람마다 각자의 미덕이 있다. 의사는 인간을 보존하는 예술(의학)을 통해, 인간을 새로 창조하는 것보다 더 큰일을 해낸다. 한 가정의 아버지는 다정하고 감사할 줄 아는 자녀들을 길러내며, 그들에게 첫 번째 삶보다 더 귀중한 두 번째 삶을 부여한다. 세심함과 배려로 가득 찬 남편은 동반자 안에서 스스로를 존중하며, 그녀에게 꽃으로 된 사슬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연인은 자신에게 빚진 것이 없으면서도 모든 것을 희생하는 연인이 자신을 위해 해주는 일들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비굴함 없이 친절하고 모나지 않게 진실하며, 신중하고 분별력 있고 유용한 진짜 친구는 친구를 변호하고 좋은 조언을 건네며, 자신 또한 그 외의 다른 조언은 받지 않는다. 모든 신분과 직무에는 제각기의 미덕이 있다. 충성스럽고 열성적인 시민은 조국과 군주를 위해 기도한다. 용맹하고 지혜로운 장교는 대담하고 사나운 군사들을 이끈다. 지각 있는 도덕학자는 자연에서 길어 올린 좋은 규범들을 제공한다. 역사가는 우리에게 가장 먼 고대의 가장 위대한 모범들을 보여준다. 삶의 매혹인 쾌락은 그것이 생기를 불어넣은 펜 끝에서 흘러나온다. 희극 작가는 기쁨과 함께 재치(소금)를 뿌려대는데, 전자는 정신을 자극하여 즐겁게 찌르고 후자는 마음을 확장하여 이롭게 한다. 마지막으로 비극 작가나 소설가 등은 시인적 황홀경을 통해 열광의 도가니로 끌어올려진 저 숭고함과 다정함의 감정들을 탄생시킨다. 가치(가치 있는 것)를 느끼는 것은 하나의 미덕이며, 그것에 보답하는 것은 신성한 일이다. 왕들이여, 북방의 솔로몬(프리드리히 2세)을 모방하라. 그대들이 인류의 우두머리인 것처럼, 인류의 영웅이 되라. 메체나스(예술·학문의 후원자)의 품격으로 내려가는 것이 곧 위대해지는 길이다. 영혼의 용기는 육체의 용기보다 위에 있으며, 이는 과학(학문)의 전쟁이 무기의 전쟁보다 위에 있는 것과 같다. 국가의 영광을 만들어내는 이 영혼의 용기를 지지하라. 육체의 용기는 국가의 안전만을 만들어낼 뿐이다. 후원은 천재성 위에서 작용하여, 태양이 장미를 활짝 피워내듯 천재성을 만개하게 한다. 철학자들이여, 나를 도와다오. 감히 진리를 말하라. 그리하여 인류가 영원히 어린아이의 상태(어린 시절)에 머물지 않도록 하라. 인간들의 증오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그 증오를 받을 만한 짓을 하는 것만을 두려워하자.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미덕이다. 사회에 유익한 모든 것은 미덕이며, 그 외의 나머지는 미덕의 유령일 뿐이다. 디드로(Mr. D.) 선생의 《공적 가치와 미덕에 관한 에세이》를 보라. 이에 대해 신학자들은 격분하여 부르짖는다. "본질적으로 악덕도 미덕도, 도덕적 선도 악도, 정의도 불의도 없다면 우리는 대체 어디에 서 있는 것인가? 만약 모든 것이 임의적이고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나쁜 짓을 저지른 뒤에 우리를 갈가리 찢어놓는 이 양심의 가책(remords)은 도대체 왜 존재하는가? 볼테르가 《세미라미스》에서 말했듯, 범죄자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미덕인 가책마저 빼앗아 버릴 작정인가?" 무지한 자들과 광신도들의 들끓는 수사학은 내버려 두고, 가장 훌륭한 철학인 '의사들의 철학'이 우리를 인도하는 이 새로운 행로로 차분하게 걸어 들어가자. 우리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보자. 그러기 위해 필요한 걸음은 그리 많지 않으며, 우리는 그 어린 시절이야말로 양심의 가책이 탄생한 시대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처음에 그것은 아무런 검토도, 선택도 없이 받아들여진 단순한 감정(sentiment)에 불과했으며, 부드러운 밀랍 위에 찍힌 인장처럼 뇌(cerveau) 속에 강력하게 각인된 것이었다. 의지의 절대적 지배자인 격정(paſſion)이 잠시 동안 이 감정을 억누를 수는 있다. 그러나 격정이 멈추고, 특히 영혼이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와 냉정하게 성찰할 때 가책은 다시 살아난다. 왜냐하면 양심을 형성하는 첫 번째 원칙들, 즉 어린 시절에 스며들었던 그 원칙들이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며, 이것이 바로 양심의 가책이라 불리는 현상이다. 그 효과는 사람마다 무한히 다양하다. 따라서 양심의 가책이란 '성가신 기억(réminiſcence)'이자, 다시 우위를 점하게 된 '오래된 감각 습관'에 불과하다. 원한다면 그것은 새로이 재생된 흔적(trace)이며, 결과적으로 육체적 쾌락과 격정이 완전히 잠재우지 못해 결국 조만간 거의 언제나 깨어나고야 마는 '오래된 편견(préjugé)'이라고 해도 좋다. 인간은 이처럼 자기 내면에 가장 큰 적을 품고 살아간다. 그 적은 인간을 어디든 따라다니며, 부아launch가 호라티우스를 인용해 시름(chagrin)에 대해 말했듯, 인간의 말 뒤에 올라타 그와 함께 질주한다. 다행히도 이 잔인한 적이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더 오래되었거나 더 강력한 다른 모든 습관이 필연적으로 그것을 이겨내기 마련이다. 아무리 잘 닦인 길이라도 길을 막거나 절벽을 메우면 지워지듯이 말이다. 또 다른 교육, 동물 정기(eſprits, 신경 신호)들의 또 다른 흐름, 또 다른 지배적인 흔적들,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또 다른 감정들은, 새로운 기계적 메커니즘(nouveau mécaniſme)이 이전의 것들을 폐기하고 그 잔해 위로 솟아오르지 않는 한 우리 영혼에 침투할 수 없다. 이제 반박 불가능한 사실들을 보라. 바다 위에서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제비뽑기로 희생된 동료를 잡아먹는 이들은 식인종들과 마찬가지로 그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습관이며, 모든 것을 허용하는 필연성(néceſſité)이다. 종교가 다르면 양심의 가책도 다르고, 시대가 다르면 풍속도 다르다. 리쿠르고스는 약하고 병든 아이들을 물에 던져버리면서 자신의 지혜를 자찬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나오는 그의 삶을 보라. 그것 하나만으로도 내가 대강 주장하는 바에 대한 상세한 증거를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스파르타에서는 수치심도, 도둑질도, 간통도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곳에서는 여성들이 암캐들처럼 공공연하게 난잡하게 섞여 살았고, 스파르타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가장 잘생기고 건장한 청년에게 기꺼이 내주었다. 과거에는 여성들만이 자신의 연인이 다른 남성을 연모하는 것(남색)을 두고 라이벌 의식에 얼굴을 붉혔던 반면, 남성들은 일반적인 남녀 간의 사랑과 미덕을 경멸하며 승리감에 도취하곤 했다. 모든 악덕을 합친 것보다 더 끔찍하면서도 그 어떤 후회(repentir)도 따르지 않는 인류의 재앙은 바로 전쟁의 학살이다. 군주들의 야심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후회를 만들어내는 양심(conſcience)이란 철저히 편견의 딸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홧김에 일어난 첫 번째 충동에 휩쓸려 불량한 시민을 때려눕혔거나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격정에 굴복한 저 훌륭한 인간, 즉 너무나 대단한 가치를 지닌 바로 그 인간은 양심의 가책에 시달린다. 만약 그가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적을 죽였거나, 사제가 그의 사랑을 정당화해 주어 온 자연이 행하는 바를 행할 권리를 부여받았더라면 결코 느끼지 않았을 가책 말이다. 아! 만약 은총(graces, 사면권)이라는 것이 명성 높은 불행한 자들을 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데카르트가 암시하듯 어떤 경우에 사면권을 행사하는 것이 법의 엄격함보다 훨씬 더 엄숙하고 왕다운 일이라면, 내가 보기에 가장 본질적인 사면은 인간을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면제해 주는 것이다. 인간, 특히 정직한 인간이 어찌 내면의 고문관들에게 내맡겨지기 위해 만들어졌겠는가? 타락한 제도(art dépravé)가 파괴해 버린, 자연이 수많은 매력으로 삶에 밀착시키고자 했던 그 인간이 말이다. 아니다. 나는 현자가, 수많은 악당이 '습관의 힘' 덕분에 얻는 것을 오직 '이성의 힘'을 통해 얻기를 바란다. 다른 인간들에 대해 마땅히 누릴 자격이 없는 평화와 평온을 되찾아 더 이상 불행하지 않게 될 어느 한 사기꾼의 뒤편에서, 지극히 순수하고 부드러우며 감미로운 삶의 한복판에서 부당하게 고통받던 수많은 현명하고 도덕적인 이들이 마침내 너무나 무거운 교육의 멍에를 벗어던질 때, 그들은 더 이상 구름 없는 맑은 날들을 누릴 것이며, 자신들을 집어삼키던 권태의 자리에 감미로운 즐거움이 이어지게 할 것이다! 유기적 구조(organiſation)의 지배력을 더 잘 이해하자. 법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그 어떤 악한 자도 제어되지 않을 것이다. 양심의 가책은 범죄가 일어나기 전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으며(최소한 가책을 만들어내는 원인은 작동하지 않으며), 범죄가 일어나는 중이나 일어난 후에도 쓸모없기는 매한가지다. 가책이 나타났을 때는 이미 범죄가 저질러진 후다. 그리고 오직 가책이 필요 없는 선한 이들만이 그것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뿐이다. 악한 자들이 겪는 내면의 고통은 그들의 재범을 거의(혹은 결코) 막지 못한다. 만약 양심의 가책이 선한 이들과 미덕에 해를 끼쳐 그 결실을 부패시키고, 악당들의 사악함에는 아무런 브레이크 역할도 해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인류에게 최소한 무용할 뿐이다. 가책은 가뜩이나 잘못 조절되어 악을 향해 끌려가는(마치 선한 이들이 선을 향해 끌려가듯), 그리하여 필연적인 법의 그물에 조만간 걸려들 수밖에 없어 이미 법에 대한 공포만으로도 차고 넘치는 저 불쌍한 신체 기계들에게 추가적인 짐을 지울 뿐이다. 만약 내가 그들에게서 삶의 이 무거운 짐을 덜어내 준다면, 그들은 덜 불행해질 것이며 그렇다고 처벌을 면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가책이 사라진다고 그들이 더 사악해질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책이 그들을 더 착하게 만들어주지 못하므로, 사회가 그들을 가책으로부터 해방해 준다 한들 아무런 위험이 없기 때문이다. 건전한 철학이 고작 정직한 사람들만을 겁주는 유령들을 실재화하는 데 힘을 낭비하며 스스로를 욕보일 필요는 없다. 정직한 이들의 청렴함이란 단단하기는커녕 너무나 유약하고 순진하기 때문이다! 그 정직한 이들에게 가책을 없애주는 것은 하나의 불행이 줄어드는 것이자 하나의 행복이 더해지는 것이다. 이들을 축하하고, 그 무엇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저 다른 자들을 동정하자. 자연은 그들에게 어머니라기보다 계모처럼 굴었던 것이다. 그 악당들이 행복해지려면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확실성만큼이나 커다란 철학을 가져야 할 것이다. 양심의 가책이란 우리의 악덕에 대한 헛된 처방이며, 심지어 가장 맑은 물을 흐려놓을 뿐 가장 흐린 물을 맑게 해주지는 못하므로, 그것들을 완전히 파괴해 버리자. 삶의 좋은 곡식 사이에 더 이상 가라지가 섞여 있지 않도록, 이 잔인한 독약을 영원히 쫓아내 버리자. 내가 크게 틀린 것이 아니라면, 이 해독제(물질주의 철학)가 최소한 그 독을 교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릴 권리가 있다. 만약 자연과 이성에서 길어 올린 기쁨들이 정말로 범죄라면, 인간의 행복은 기꺼이 범죄자가 되는 데 있다. 아, 가련하도다, 그들의 기쁨이 곧 범죄가 되는 자들이여! (Heu! miſeri, quorum gaudia crimen habent!) 것이 바로 다른 수많은 획득된 관념들처럼, 자연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태어났다는 이른바 '자연법'이라는 가짜 훈장으로 장식되기를 거부하고 오직 순전한 필요성에 따라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진짜 자연의 모습이다. 자연은 그런 가짜 명예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돈만 주면 사는 새로운 귀족 작위보다 자신의 오랜 평민 신분의 역사성을 더 선호하는 훌륭한 부르주아처럼, 잘 조직된 영혼(une ame bien organiſée)은 자신의 현재 모습에 만족하고 그 이상의 부당한 시선을 던지지 않으며, 자신에게 속한 것 이상으로 부여되는 모든 허례허식을 경멸하고 오직 순수한 감각(ſentiment)으로 스스로를 제한한다. 그 감각을 다루는 기술은 바로 교육의 조련이 부여하는 것이다. 오만함이 우리의 영혼에 그토록 아낌없이 부여하는 저 화려한 지식들은, 그것을 획득하는 과정이 전제하는 진짜 가치를 영혼에게서 박탈함으로써 영혼에게 장점을 주기보다 오히려 더 큰 해를 끼친다. 왜냐하면 저 가짜 자연법과 본득적 관념(innate ideas)이라는 가설 속에서는, 영혼이 태어날 때부터 선과 악의 분별을 비롯한 수천 가지의 지식을 이미 가지고 오는 셈이 되므로, 이는 마치 출생의 우연 덕분에 손 하나 까딱 않고 귀족 작위를 물려받아 아무런 자격도 없는 자들과 같아지기 때문이다. 자연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은, 자연 그 자체만으로는 인간이 가진 그 수많은 지혜의 빛을 설명하기에 불충분하다고 보았기에 여러 영적 실체(Substances)들을 상상해 냈고, 극히 불합리하게도 《영혼의 역사》의 저자가 증명했듯 진짜 '이성적 환상물( êtres de raison)' 속에서 이성적 지능을 찾으려 헤맸다. 어떤 이들이 미덕과 악덕이라는 단어에 그럴듯한 기반을 부여하여 그것들을 실재하는 것처럼 속이기 위해 본득적 관념을 무상으로 조작해 냈다면, 다른 이들 역시 유기체들 안에서 관찰되는 특정 기질을 근거로 삼아—동물들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하고 인간에게는 그것이 교육과 절반씩 지분을 나누어 가진다며—모든 유기체에게 양심의 가책을 부여하는 우를 범했다. 이 체계는 모든 조건이 대등할 때조차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가책에 취약하며, 가책이라는 것 자체가 교육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다양해진다는 사실만 고려해 보아도 결코 유지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인간 기계》 저자(라 메트리 자신)가 저지른 오류다. 그는 생드브르몽 선생의 저작으로 추정되는 잘 정돈되고 잘 쓰인 소책자의 저자만큼 양심의 가책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했거나, 아니면 (내가 그를 그렇게 의심하진 않았지만) 감히 세상의 모든 편견에 동시에 맞서 무기를 들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악과 마찬가지로, 선에도 제각기의 단계가 있다. 미덕이라는 관념은 우리 존재와 함께 주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교육과 시간이 우리의 신체 기관을 발달시키고 장식해 놓은 후에도 그 기관 안에서 결코 안정되게 유지되지 않는다. 미덕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언제든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새와 같다. 첫 번째 나쁜 주름은 너무나 쉽게 잡힌다. 유기적 구조(l'organiſation)는 마치 완벽함과 예술적 교육이 자신을 옥죄고 방해했다는 듯이, 교육이 자신에게서 앗아간 것처럼 보였던 본래의 야수성을 기계적으로 다시 회복한다. 나쁜 책이 주는 전염성과 나쁜 부류들과 어울리는 것의 위험성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비뚤어진 모범 하나, 기만적인 대화 한 마디가 교육이 이룩해 놓은 가장 아름다운 시선들을 너무나 자주 파괴하며, 사악한 자연은 다시 사악해진 자기 자신을 보며 자찬한다. 자연은 그것이 훨씬 더 편안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마치 똑바로 걷는 것 자체가 격렬하고 고통스러운 일이기라도 한 듯, 기꺼이 절뚝거리며 걸어간다. 만약 똑바로 걷는 길이라는 게 존재하기라도 한다면 말이다. 가장 잘 획득되고 가장 강력하게 뿌리내린 미덕조차 이토록 나약하게 흔들린다는 사실은, 미덕을 지탱하기 위해 좋은 모범과 좋은 조언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찬사나 보상, 장려금을 통해 인간의 자애심(인정욕구)을 달래주어 자애심 스스로가 미덕을 향해 나아가도록 고무하고 자극해야 할 필요성을 증명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고 특정한 명예심에 의해 자극받지 않는다면, 아무리 훈계하고 웅변하고 연설해 보았자 그는 언제든 탈영할 불량 군사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경멸하는 자는 누구든 죽일 수 있다고 정당하게 말한다. 자신의 자애심을 경멸하는 자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인간이 그 정도의 무기력(indolence)과 냉소에 도달한다면 모든 미덕이여 안녕이다! 미덕의 원천은 필연적으로 말라붙어 버릴 것이다. 오직 자애심만이 자신이 탄생시킨 미덕에 대한 취향을 유지할 수 있다. 자애심의 결핍은 자애심의 과잉보다 훨씬 더 두려운 것이다. 고대인들이 우리에게 그토록 숭배하라고 강요하지만 우리가 보기엔 그저 정신병원(petites maiſons)에나 들어갈 바보들에 불과한 디오게네스나 크리시포스 같은 자들로만 구성된 사회란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만약 악을 향한 성향이 너무나 강력하여 선한 이가 악하게 되는 것이 악당이 선하게 변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면, 인류가 가진 이 잔인한 경향성을 차라리 처벌 대신 변명해 주자.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고 삶의 모든 노예 상태 속에서 우리를 따라다니는 저 신체적 사슬과 멍에를 결코 놓치지 말자. 산꼭대기와 산기슭에 심어진 저 나무들을 보라. 어떤 것은 작고 어떤 것은 크다. 그들은 본래 지닌 씨앗뿐만 아니라, 그들이 심어진 토양의 온도가 얼마나 따뜻하고 차가운지에 따라서도 완전히 달라진다. 인간 역시 동일한 법칙에 따라 식물처럼 자라날(végete) 뿐이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기후의 영향을 받으며, 자신이 흘러나온 아버지의 체질을 이어받는다. 모든 자연 원소들이 이 약하디약한 신체 기계(foible machine)를 지배한다. 기계는 축축하고 무거운 공기 속에서는 맑고 건조한 공기 속에서처럼 사유할 수 없다. 이처럼 수많은 외부적 원인에 의존하고, 하물며 그보다 더 많은 내부적 원인에 의존하고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지금의 우리 모습과 다르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내면의 태엽과 용두(reſſorts)들을 우리가 어떻게 제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누가 믿겠는가? 심지어 사악한 짓을 저지르는 원동력조차 '안녕(bien-être, 행복)'을 향한 갈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배신자, 폭군, 살인자 역시 정직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안녕에 이끌려 행동할 뿐이다. 의지는 영혼과 육체의 현재적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을 갈망하고 추구하도록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이 혈액 순환(circulation)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을 통해 유도되겠는가? 순환이 없다면 의지도 감각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아침에는 도덕적이었다가 저녁에는 타락하든 간에, 그것은 내 피(sang)가 원인이다. 피가 걸쭉해지거나, 멈추거나, 묽어지거나, 급하게 질주하는 것이 원인인 것이다. 이는 마치 피가 다른 경로가 아닌 특정 경로를 선택함으로써, 피가 내 척수와 뇌수 속으로 걸러 보낸 동물 정기들이 모든 신경으로 다시 전송되어, 나로 하여금 공원을 걸을 때 오른쪽이 아닌 왼쪽으로 발을 틀게 만드는 것과 정확히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으며, 나의 자유(liberté)를 자찬한다. 우리의 가장 자유로워 보이는 모든 행동이 이와 같다.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결정(détermination abſolument néceſſité)이 우리를 끌고 가고 있음에도, 우리는 노예가 되기를 거부할 뿐이다. 우리는 참으로 어리석다!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할 수 없었던 일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내면에서 스스로를 책망하고 비난(reproches)하기에, 우리의 어리석음은 그만큼 더 비참하고 불행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계적으로 자기 자신의 안녕(bien propre)을 향해 이끌리고, 이러한 성향과 거부할 수 없는 기질을 타고나기 때문에, 지구 표면을 기어 다니는 수많은 쓸모없는 자들이 그러하듯 각 개인이 자기 자신을 다른 그 누구보다 우선시하는 것은 결국 자연의 질서를 따르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의 질서 속에서는 인간이 행복해질 수 없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기괴하고 비이성적인 생각이다. 만약 악을 행하는 자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이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의 대가로 사형대에서 형벌을 받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하물며 타인이 자신들을 대신해 맹세한 약속(사회적 계약)을 지킬 의무가 없다고 믿으며 그저 선을 행하지 않는 것에 만족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안락함과 본래의 감각 방식(façon de ſentir)에 따라 얼마든지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몬테뉴가 매우 적절히 말했듯, "이성이 우리를 기만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성은 오직 우리의 만족만을 겨냥해야 하며, 이성의 모든 노력은 결국 우리를 잘 살게 만드는 것, 즉 우리를 안락하게 만드는 데 맞추어져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견해가 일치하는 지점은 바로 쾌락(le plaiſir)이 우리의 목적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이 어떤 역할을 맡아 연기하든 간에, 그는 언제나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의 역할을 놀이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미덕 속에서조차, 우리 시선의 최종 목적지는 결국 육체적 쾌락(la volupté)이다." 이 얼마나 순진하고도 매력적인 에피쿠로스주의자인가! 영혼의 즐거움이야말로 행복의 진짜 원천이므로, 행복의 관점에서 볼 때 선과 악은 그 자체로 지극히 무차별한(indifférens)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다. 따라서 악을 행하는 데서 더 큰 만족을 얻는 자는, 선을 행하는 데서 더 적은 만족을 얻는 그 어떤 누구보다도 훨씬 더 행복할 것이다. 이는 왜 이 세상에 그토록 많은 악당(coquins)들이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며, 미덕 없이도, 심지어 범죄 속에서도 발견되는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행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거의 모든 인간의 정신 속에서 한층 더 고결하고 아름답게 여겨진다고 해서 결코 더 순수하다고 볼 수는 없는 행복의 또 다른 원천은, 바로 사회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오는 행복이다. 인간이 지닌 자연적 결정(기질)이 사회의 관점에서 볼 때 더 사악하고 괴물처럼 보일수록, 사람들은 그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교정 장치(correctifs)들을 도입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인간들 사이의 교류와 상업에 중요한 행위들에 관대함, 위대함, 인도주의라는 관념을 연결해 놓았으며, 자신에게 아무리 큰 이득이 돌아올지라도 타인에게 결코 해를 끼치지 않는 자에게는 존경과 배려를 부여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조국, 우정, 사랑, 혹은 인류에 이바지하는 자에게는 경의와 명예, 그리고 영광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자극제(aiguillons)들 덕분에, 인간의 형상을 한 수많은 동물들이 비로소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 인간을 열매를 맺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그들의 본래 자연 상태 그대로 방치하는 대신, 수액이 접붙인 가지로 가장 잘 흘러 들어갈 수 있는 어린 시절에 그들을 조련하고 접목(greffer)해야만 했던 것이다. 보라, 나는 교육(l'éducation)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결코 지치지 않는다. 교육만이 우리가 그것 없었더라면 결코 가지지 못했을 감정들과 행복을 우리에게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교육이 우리의 본능이나 감각 방식에 가져다주는 수정과 변화의 효과다. 조련된 영혼은 이전처럼 오직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인도될 때는 원하지도, 따르지도, 행하지도 않았던 것들을 원하고 따르고 행하게 된다. 수천 가지의 새로운 감각들로 인해 눈을 뜬 영혼은, 과거에 좋다고 여겼던 것을 나쁘다고 느끼게 되며, 타인 안에서 비난했던 것을 찬양하게 된다. 우리는 참으로 교육의 바람에 따라 끊임없이 회전하는 '풍향계(girouettes)'와 같다. 그러나 우리의 신체 기관들이 다시 본래의 물리적 어조(ton naturel)를 회복하여 우리를 소환할 때, 우리는 다시 우리의 첫 번째 자리로 되돌아가 원초적인 기질들을 따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과거의 자연적 결정들이 다시 살아나고, 교육이라는 기술이 만들어냈던 흔적들은 깨끗이 지워진다. 인간은 사회의 이익을 위해 자신이 원하는 만큼조차 교육의 효과를 유지할 수 있는 주인이 아닌 것이다. 이 물질주의(matérialiſme)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이 철학은 관용, 변명, 용서, 사면, 찬사,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후회 속에서 집행해야 하는 형벌의 절제와, 미덕에 바치는 아낌없는 보상의 진정한 원천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덕이란 곁방살이(hors-d’œuvre)나 낯선 장식품과 같아서, 지탱해 줄 버팀목이 없다면 언제든 도망치거나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는fragile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에 있어서 공공의 이익(l'intérêt public)은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미친 개는 반드시 죽여야 하고, 독사는 짓밟아 으깨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악한 자들과 선한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유일한 차이란, 전자는 전체의 이익보다 사적인 이익(l'intérêt particulier)을 우선시하는 반면, 후자는 친구나 대중 같은 타인의 이익을 위해 자기 자신의 안녕을 희생한다는 점뿐이다. 이제 나에게는 '용기(courage)'라고 불리는 저 새로운 미덕의 원천을 열어젖히는 일이 남아있다. 약하고 비겁한 마음을 가진 자들은 역경의 무게 앞에 굴복하지만, 강하고 용기 있는 영혼들은 그것을 견뎌낸다. 특히 지적으로 깨어 있어, 행복한 유기적 구조(organiſation) 위에 유익한 학문적 연구를 결합한 이들이 그러하다. 그러니 숨을 고르지 말고 계속 걸어가자. 이토록 아름다운 길에서 결코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노력하자. 몸에 충격과 격동이 있듯 영혼에도 격동이 있다. 운명은 영혼을 자신의 뜻대로 뒤흔들 수 있지만, 이것은 의사(médecins)도 치료제(remedes)도 없는 질병이 아니다. 에피쿠로스, 세네카,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몬테뉴, 이들이 바로 역경 속에서 나를 치료해 주는 의사들이며, 그들의 용기가 곧 치료제다. 심하게 넘어지고 나면 뇌의 신경 섬유들과 함께 감각이 주저앉아 버린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 감각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는 사혈(ſaignée)을 통해 억눌린 태엽들을 복구해 주어야 한다. 정신의 영역에서도 정확히 이와 같다. 이 위대한 작가들이 가진 힘, 위대함, 그리고 영웅주의는 충격을 받은 영혼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마치 불행의 나약함 속에서 영혼을 지탱하고 회복시켜 주는 일종의 강심제(cardiaque)처럼 말이다. 그토록 조롱받고 비난받아온 스토아주의(le ſtoïciſme)는 우리에게 승리의 무기를 빌려준다. 그것은 폭풍우에 부서진 우리의 배를 수리할 수 있는 일종의 안전한 항구를 제공한다. 이보다 더 좋은 나침반이 어디 있겠으며, 이보다 더 유익한 훈련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투쟁하는 법을 배운다. 나는 영혼의 검투사들과 함께 나 자신 또한 투쟁 선수가 된다. 난파당하지 않고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는, 오직 이성(raiſon)이라는 근육을 사용하기만 하면 된다. 전투에서 승리자로 걸어 나올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용기다. 이것이 바로 문학(학문)을 하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자산이며, 학문을 닦지 않는 자들에게는 금지된 영역이다. 그러나 이 학문의 힘조차, 예컨대 오직 타고난 신체 기질(tempérament) 자체만으로 문학의 도움 없이 늘 유쾌했던 스카롱처럼, 잘 조직된 수많은 평범한 이들의 천성 앞에서는 한풀 꺾이기 마련이다. 자연은 자신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슬픔을 느낄 수 있으며, 심지어 느껴야만 한다. 다만 비겁하게나 철부지 대중처럼 느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아름다운 모범들에 의해 고무된 용기 있는 인간으로서, 혹은 철학자로서 느껴야 한다. 그러한 철학자로서 나는 인간이라는 조건에 따라 역경에 굴복했고, 한 인간으로서 그 역경을 뼈저리게 느꼈다. 첫 번째 직함(철학자)이 나에게 영광을 준다면, 두 번째 직함(인간) 역시 나를 결코 부끄럽게 만들지 않는다. 나는 인간이므로, 인간적인 것 치고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nihil humani à me alienum puto). 나를 이 세상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신들이 아니라,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왕(프리드리히 2세)께서 보호해 주시어 비껴가게 해 주신 저 불운과 실각(diſgrace)이 다시 찾아온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여전히 느끼겠지만 의연히 버텨낼 것이다. 《인상에 관한 서한》의 사랑스러운 저자가 말했듯, 역경이란 미덕을 제련하는 도가니이자 미덕을 낳아주는 산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경은 때때로 미덕을 무너뜨리는 역병이자 암초가 되지 않던가? 아! 가난, 비참함, 고통, 그리고 사슬(투옥)은 우리를 얼마나 슬프고 비참한 극단으로 몰고 가는가! 공포와 절망이 그 뒤를 따르며, 타락하고 용기를 잃은 영혼은 더 이상 죽음 외에는 그 어떤 희망도, 갈망도 품지 못하게 된다. 영혼은 자신의 나약함이나 자신을 붙잡고 있는 편견들을 자책하지 않고서는 좀처럼 죽음을 미루지 못한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곧 고통이기에 무(néant)를 하나의 선(善)으로 바라보며, 스스로를 그 무의 심연 속으로 던져버리는 것을 하나의 의무로 삼게 되는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오직 자기 자신의 고통을 지속시키기 위해 삶을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을 위반하는 행위다. 나는 가장 성스러운 성자들과 가장 강력한 영혼들이 어쩔 수 없이 죽음을 갈망하고, 그들의 친구들마저 그들을 위해 죽음을 기원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위대한 의학자 부르하버의 슬픈 운명이 이를 증명한다. 삶에 단 하나의 좋은 것도 남아있지 않고, 반대로 끔찍한 수많은 고통들만이 삶을 포위하고 있을 때, 우리는 굳이 치욕스러운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가? 내가 가난과 고통을 전혀 견디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시대의 가혹함에 순응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토록 칭송받는 저 수많은 용기(혹은 차라리 광기)의 순간들은, 종종 비겁한 자로 하여금 평생 동안 용기를 내야 하는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게 만들기 위해 찾아올 뿐이다. 자살(le ſuicide)을 옹호하기 위해 떠들어댄 그 모든 주장들은 결국 교묘한 궤변이자, 시적 열광이며, 졸렬한 영혼의 객기일 뿐이다! 역경 속에서 고작 가난 하나를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자를 두고 대체 무슨 수로 대단한 용기를 가졌다거나 강인한 영혼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풍요로움 속에서는 그토록 강인함을 과시하던 자들이, 어찌 비참함의 품 안에서는 이토록 무력하게 힘을 잃어버린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통과 가난은 절대 악이 아니라며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듯 고고하게 굴던 자가, 막상 위기가 닥치자 자기 자신의 철학 체계를 까맣게 잊어버린 채 자살을 권유하다니! 나의 스토아주의자는 말한다. "빵이 부족하다고 우는가!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네게는 죽을 수 있는 수단이 부족하지 않은데? 이 세상에 태어나는 방법은 고작 하나뿐이지만, 그 누구도 붙잡지 않는 자연은 네가 이 세상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 백 가지를 제공한다." 아니,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덕만 있다면 궁핍함 속에서도 결코 불행해질 수 없다고 호언장담하지 않았던가! 이제야 네 속셈을 알겠다. 네가 말하는 그 미덕이란, 멍에가 너무 무거워 짊어지기 힘들 때는 그것을 과감히 벗어던지는 데 있을 뿐, 정작 별다른 고통이 따르지 않을 때 조용히 멍에를 짊어지는 데 있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우리의 영혼을 우쭐하게 만드는 용기를 이토록 요란하게 과시해 놓고선, 가장 아름다운 길목에서 이처럼 멈춰 서버리다니! 가난과 질병은 악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정작 그것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말하다니! 지식인(bel eſprit)들의 가소로운 모순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이 이교도 철학자는 철학자의 가장 중요한 책무가 매일같이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가. 이는 철저히 기독교의 발자취를 그대로 뒤밟는 짓이다. 죽음 이후의 결과( 사후세계)를 전혀 두려워하지도 믿지도 않는다면, 그리하여 설령 너무 일찍 죽는 경우가 아닐지라도 (왜냐하면 나로서는 살아가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인간에게 있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최소한 아트로포스(운명의 여신)의 가위를 두려워하지도, 반대로 갈망하지도 말아야 마당하다. 여신이 원할 때 언제든 삶의 실을 끊도록 내버려 두고, 우리는 그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신체 기계의 메커니즘에 의한 것이든, 혹은 이성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너무나 거대한 쾌락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죽음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든 간에, 우리 내면에 그 어떤 불안감(inquiétude)도 남아있지 않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만약 죽음이라는 관념이 나를 성가시게 하거나 겁나게 만든다면—마치 키케로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듯—나는 죽음과 대면하여 그것을 허세 부리며 비웃는 영광을 누리기보다, 차라리 죽음이라는 생각 자체를 영원히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편을 택하겠다. 사신의 낫은 모든 인간을 향해 들어 올려져 있고, 나는 그 엄연한 법칙에 순응할 뿐이다. 벌벌 떠는 것은 무지한 대중의 몫이다. 오직 단 한 번뿐인 현세의 삶만을 인정하는 자가 (자신이 건강 염려증 환자가 아니라서 이 삶을 지극히 아름답고 좋은 것으로 누리고 있다면), 자신이 전혀 두려워하지도 않는 죽음의 타격을 맞이하기 위해 구태여 준비를 한답시고 설쳐대는 것이나, 혹은 삶이 충분히 견딜 만하고 심지어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죽음을 앞당기는 것이나, 둘 다 똑같이 임의적이고 어리석은 짓이다. 가장 감미로운 삶의 여정을 놔두고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광기인가! 고독하고 철학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자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믿으며, 그리하여 화려한 꽃으로 된 사슬을 짊어지느니 차라리 삶을 하직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또 얼마나 대단한 착각인가! 솔직히 말해서, 세네카가 자신의 편지를 받는 수신인이자 그토록 막강한 권력을 쥐고, 높은 관직에 올랐으며, 막대한 부와 쾌락에 둘러싸여 살아가던 루킬리우스에게, 그 수많은 명예와 육체적 즐거움들이 영혼에 너무나 하찮은 짐에 불과하다는 핑계를 대며 진심으로 죽음을 권유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죽음을 향한 이 기이한 취향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몬테뉴조차, 스토아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이 철학자의 가장 핵심적인 연구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점은 내 보기에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과오다. 죽음과 친숙해지기 위해 온갖 수단을 끊임없이 동원하는 행위는, 역설적이게도 자기 내면의 두려움과—그의 표현을 빌리자면—'겁쟁이 같은 나약함'을 스스로 폭로하는 꼴일 뿐이다. 그것은 막상 죽음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당황하지 않으려는 눈물겨운 발버둥에 불과하다. 마치 생쥐를 무서워하는 아이에게 그 공포증을 치료해 준답시고, 진짜 생쥐를 보여주기 전에 쥐 그림을 가져와 꼬리부터 귀까지 한 부분씩 차례대로 보여주며 안심시키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우리의 이 사랑스럽고 현명한 회의주의자(몬테뉴)를 이러한 기만의 덫으로 끌고 들어갔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철학이 화려하게 장식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떠들어댄 어느 스토아 철학자(세네카)였다. 이는 마치 화학이 없으면 의학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오만한 화학자의 궤변보다 훨씬 더 비이성적인 주장이다. 올바르게 중심이 잡힌 건전한 철학은 우리를 죽음이 아니라 '삶을 향한 사랑'으로 인도한다. 우리를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은 오직 철학이 가진 광신주의(광기)일 뿐이다. 다만 참된 철학은, 마침내 운명의 시간이 진짜로 도래했을 때 의연하게 죽는 법을 가르쳐줄 뿐이다. 평소에는 그토록 모순덩어리였던 세네카였지만, 막상 진짜 죽어야 할 때가 왔을 때는 의연하게 죽을 줄 알았다. 그는 자신의 날카로운 통찰력을 발휘하여 자신을 위협하는 폭풍우를 멀리서부터 예견했고, 자신의 철학을 (그때만큼은 아주 적절하게) 활용하여 그 타격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마침내 황제로부터 자살 명령이 내려지자, 그는 냉정하고 침착하게 자신의 죽음 방식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자신이 살아생전에는 비록 평범한 인간으로서 대중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자 가장 잔인한 군주(네로)가 내린 파멸의 선물이었던 저 거대한 부와 명예에 집착했을지언정, 버려야 할 때가 왔을 때는 또 다른 삼손처럼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던지고 자신이 속한 학파의 영웅으로서 사슬을 끊어낼 줄 안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해 보였다. 그가 스스로 암시했듯,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 앞에서 순순히 걷지 않고 뒤로 질질 끌려가는 것만큼 수치스러운 일은 없으며, 죽음에 대한 거대한 경멸을 통해 죽음 그 자체보다 한 걸음 위로 솟아오르는 것만큼 아름다운 일은 없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아름다운 단 하나의 행위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내가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닐 때, 타인과 사회를 위해 내 삶의 멍에와 역경의 무게를 끝까지 의연하게 버텨내고 살아남는 용기다. 이 세상에는 또 얼마나 수많은 종류의 영광들이 존재하는가! 군대의 무기가 주는 영광, 학문(과학)이 주는 영광, 그리고 예술이 주는 영광 등, 마음껏 달릴 수 있는 아름다운 들판이 이토록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그러나 이제 글을 줄이자. 수많은 작가들이 저지르는 저 알맹이 없는 무익한 다작(多作)의 유혹을 경계하자. 오직 학문과 문학(les lettres)만을 향한 격정만을 품은 자라면, 그 학문의 뒤를 따르는 영광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관습적인 길을 벗어나기를 두려워하여 기성 의견에서 감히 멀어지지 못하고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지 못하는 자들을 두고, 호라티우스가 모방자들을 향해 던졌던 말을 똑같이 돌려주겠다. "노예 같은 무리(servum pecus) 같으니라고!" 마치 악마에게 붙들린 듯 글을 쓰고 싶어 안달이 난(démangeaison d’écrire) 당신들, 한 줌의 명성을 위해서라면 페루의 은광이라도 기꺼이 바칠 당신들이여, 다른 이들의 뒤를 졸졸 기어 다니거나 박식함의 먼지 구덩이 속을 굴러다니는 저 천박한 삼류 작가들의 비루한 무리를 이제 그만 내팽개쳐라. 꽃 한 송이 없이 쓸쓸하고 단조롭게 끝없이 펼쳐진 저 황량한 들판에 비견될 만한 저술을 남기는, 저 고리타분한 학자들을 이제 그만 내버려 두어라. 글을 아예 쓰지 말거나, 아니면 전혀 다른 날갯짓을 시작하라. 당신의 행동에서 그러하듯 당신의 글 속에서도 자유롭고 위대해져라. 고결하고 독립적인 영혼을 보여주어라. 이 길이 위험하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인간을 연구 과제로 삼는 자는 필연적으로 인간을 적으로 맞이할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갈릴레오는 지구가 돈다고 감히 생각했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소의 감옥에 갇혔다. 교회의 이러한 폭정은 데카르트를 거대한 공포에 빠뜨린 선례가 되었다. 그러나 위험과 함께 영광이 커진다면, 그 영광과 함께 행복 역시 커지지 않겠는가? 내가 이에 대해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은, 그리 행복하지 못한 지역에 사는 이들을 유혹하지 않기 위해서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철학은 누구에게나 아름답고 선한 것으로 보이지만, 최소한 보통의 경우에, 사람들이 철학의 그 아름다운 눈망울에 반해 구애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명성을 쫓지 않으면서도 우리 삶의 행복 혹은 불행의 별이 되는 저 특유의 천재성을 스스로 느끼는 이는 거의 없다. 명성이란 진리가 낳았을 때는 찬란한 유령이지만, 보다 지배적이고 전제적인 여왕인 '세간의 평판(opinion)'이 낳았을 때는 막강한 권력이 된다. 정신의 제국에서 이룩한 발견과 정복을 되풀이하여 공표하기에는 명성이 가진 백 개의 입으로도 모자라다. 그것들은 모든 문학적 노고에 주어지는 대가이자 보상이며, 이러한 매혹적인 미끼(amorce)가 없다면 저술 작업은 훨씬 더 드물어지고 더 불완전해졌을 것이다. 사람들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생각하고 타인을 위해서는 생각하지 않거나, 차라리 생각은 덜 하고 감각은 더 많이 채우려 들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철학을 마치 우리의 정부(maîtresse)처럼 취급하면서, 철학이 우리에게 베푼 총애를 온 우주가 비밀리에 공유해 주기를 바란다. 따라서 우리가 미덕을 행하는 방식이 그러했듯, 우리가 철학을 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의 연구와 우리가 베푸는 봉사 속에는 지적 호기심이나 타인을 도우려는 마음보다는 허영심(vanité)이 훨씬 더 많이 들어차 있다. 그러니 배은망덕함에 대해 스스로 보상받고, 감사할 줄 모르는 수많은 이들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감정을 자기 내면에서 찾아내는 것은 지극히 정당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종이 조각에 낙서를 끄적거릴 줄 알게 되자마자 모두가 쫓아다니고, 손에 넣지 못했을 때는 격멸하면서도 막상 유명해지면 경멸하는 척 위선을 떠는, 세상에 그토록 요란한 소문을 퍼뜨리는 저 '평판(réputation)'이란 대체 무엇인가? 마르스와 벨로나의 나팔보다 훨씬 더 강력하여, 우리의 용기를 북돋우고 위험에 대해 귀를 멀게 만들며, 오직 이성(raison)이라는 무기만을 들고서 이성과 세월을 이겨낸 적들과 싸우도록 우리를 부르는 저 나팔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한낱 '말과 목소리(verba & voces)'에 불과하며, 이미 내 앞서 사람들이 말했듯 헛된 환영이자 꿈이요, 꿈의 그림자이며, 메아리일 뿐이다. 그러나 시인들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들보다 훨씬 더 어리석게도 철학자들은 이 메아리를 님프로, 아주 매혹적인 님프로, 아니 제멋대로 구는 신(divinité)으로 변모시킨다. 그리하여 우리의 가련한 상상력은 시인들의 상상력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키메라(chimeres)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익시온(Ixions)들처럼 언제까지나 구름을 주노 여신으로 착각할 것인가? 하찮은 것을 중대한 것으로, 가장 불모한 것을 가장 비옥한 것으로 착각할 것인가? 우리는 언제나 이성(esprit)을 감각(sentiment)으로, 허영심을 우리에게 분배된 저 정당한 자애심(amour-propre)으로 착각하며 살 것인가? 우리는 세네카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말하건대,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사물들을 깊이 음미하는 쾌락이라는 가장 위대한 선(善)을 팽개치고 경멸한다. 그토록 많은 쓰라림이 뒤섞인 것에 감미로움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말이지만, 오직 상상 속의 선과 소문, 그리고 감미로움을 쫓아다니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명성을 찾고 맛보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삶의 쾌락을 누리기 위해서인가? 수천 가지 원인 때문에 매일같이 무(néant)의 심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저 수많은 이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어쩌다 우연히(hasard) 이 세상에 던져진 이상, 인간의 가장 첫 번째이자 가장 합리적인 목표는 그저 평화롭고, 안락하며,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것(y vivre tranquille, à l’aise & content)처럼 보인다. 이는 인류의 교사임을 자처하는 자들이 내놓은 온갖 다양한 의견들보다, 모든 인간의 실제 행동을 통해 훨씬 더 분명하게 증명된 결정된 사실이다. 영혼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신체(corps)를 생각하는 것은, 영혼보다 신체를 먼저 빚어낸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확실한 길잡이가 어디 있겠는가! 이는 인간과 동물의 본능을 동시에 따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더 나아가, 우리는 정작 실천하지 못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는 저 교리를 아예 대놓고 설파하자. 인간이 자신의 영혼을 가꾸어야 하는 이유는 오직 자신의 신체에 더 많은 편안함(commodités)을 제공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수많은 작가들처럼 글을 쓰는 이유 역시, 서점상들의 돈을 가로채거나 그보다 훨씬 더 끈적끈적한 이득이 되는 존경을 거머쥐기 위해서일 뿐이다. 만약 목적인(causes finales)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것이야말로 가장 이성적인 목적인 중 하나다. 삶과 안녕을 향한 사랑은 분명 허영심(amour-propre)의 권리보다 훨씬 더 시급한 권리를 가지며, 안목이 제대로 박힌 이들에게는 쾌락이 명예보다 앞서듯, 빵(pain)이 명성보다 훨씬 더 견고한 양식이다. 그러므로 우선은 스스로 그 양식을 확보하기 위해 일하자. 이는 학자가 무식한 자보다 더 가치 있다고 믿을 만큼 순진한 인간들의 편견으로부터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이익이다. 명성이란 오고 싶을 때 언제든 오라지 마라. 우리의 이름자를 구성하는 저 알파벳 글자들을 불멸로 만들겠다는 저 허황된 명예에 스스로를 희생 제물로 바치다니, 우리는 얼마나 허망하고 무엇보다 얼마나 멍청한 호구(dupes)들인가! 우리 삶의 더 나은 항해사가 되자. 오직 감각(sentiment)만을 우리의 나침반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오직 자유와 독립, 그리고 쾌락의 항구를 향해서만 돛을 올리게 될 것이다. 내가 발을 들인 이 길의 위험성에 대해 한마디 더 보태자면, 우리가 직접 만나볼 수도 없는 후대의 찬사가 아니라, 안목을 갖춘 몇몇 동시대인들의 지지에 기댈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인정하건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철학과 뮤즈의 날개 아래에서 자신의 이성과 지식이 자라나고 확장되는 것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반드시 안전(sûreté)이 담보되어야 한다. 어미 닭이 자신의 병아리들을 채 가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런 상태에서 지혜를 닦겠다고 설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나만큼이나 세상을 믿지 않았고, 그의 판단이 옳았다. 자신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사람(소크라테스)에게 사형 선고를 내려 스스로 먹칠을 했던 아테네 공화국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자신을 모욕하는 짓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치를 만들어낸 당사자인 정치(politique)라는 것은 수치 자체를 모른다. 데카르트 역시 신학이라는 바다가 조금만 술렁여도 금세 광포해진다는 것을 알고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자리를 피했다. 4년 동안 공들인 저작을 불태워버릴 준비를 하면서, 그가 얼마나 교회의 눈치를 보았는지(그의 순진함에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지만), 자신의 물리적 의견과 추측들을 교회가 승인해 주지 않을까 봐 얼마나 전전긍긍했단 말인가. 그러므로 뮤즈의 뒤를 따르는 명성은 결코 신체의 선(善)을 잃어버린 대가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이질적이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명성에 제물로 바치는가? 그것은 허영심이 그것을 제 것처럼 가로채기 때문이다. 찬사에 의해 부풀어 오르고 퉁퉁 부어오른 우리의 상상력은 타인의 존경을 우리 내면으로 통과시키고, 그것은 너무나 거대한 자부심으로 변해버린다. 그리하여 우리는 스스로를 굉장히 중요한 인물로 바라보게 되며, 우리 자신에게서 오직 '질료와 형상(matiere & forme)'만을 보면서도, 내게 영혼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오직 나만을 위해 특수하게 주조된 아주 우월한 영혼이 있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정신이 신체에 줄 수 있는 모든 이점은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영혼이 유쾌한 자극을 받을 때 신체의 액체(혈액과 체액)들이 훨씬 더 수월하게 순환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즉 우리의 유기체(individu)가 그로 인해 고통받지만 않는다면, 명성을 얻는 것이 명성이 없는 것보다 더 큰 선임은 분명하다. 오히려 명성을 경멸하는 것에 더 큰 영혼의 위대함이 있지 않겠는가? 그것은 스토아주의자들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오만한 눈썹을 치켜뜨며 말한다. "저 뛰어다니는 미치광이들을 보라. 명성이 그들의 목적이다. 그들은 대중의 존경을 구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경을 구한다. 우리는 그것을 과시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미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이 똑같은 자들이 부( riches)를 경멸하지 않듯 평판과 명예 역시 결코 경멸하지 않는다는 것을, 오히려 그것들을 손에 넣기 위해 온갖 짓을 다 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세네카가 자신의 글 속에서 보여주는 저 정성스럽게 연출된 온갖 지적 부림들, 특히 내가 그 허세를 내 방식대로 부드럽게 다듬어놓은 바로 이 글(《행복론》)에서 보여주는 모습들이야말로 그 명백한 증거다. 비난이 악이 아니듯, 찬사 역시 선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다시 멍청하게도 상상력을 통해 타인의 마음에 매달려 살아가며, 뇌 속에서 만들어지는 유쾌하거나 불쾌한 이미지에 따라 위로를 받기도 하고 상처를 입기도 한다. 불쾌하거나 아첨하는 말은 고대인들이 말한 '좋은 침착 혹은 나쁜 침착(bene ou male placitum)'에 따라, 아름답거나 추한 그림처럼 작용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은 명예로운 일이고, 저것은 명예롭지 못한 일이다"라고 말한다. 명예라니! 아, 철학자가 아닐 때 인간은 얼마나 어리석고 가련한 존재인가! 그리고 철학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수많은 자들이 정작 그 이름을 가질 자격이 얼마나 형편없이 부족한가! 인도인들이 중국인이나 프랑스인에 대해 가지는 생각들, 터키인들이 기독교인에 대해,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터키인들에 대해 가지는 생각들이 정작 본인들에게 가 닿아 그들을 모욕하고 괴롭히는지 나는 참으로 알고 싶다. 당신들은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타인이 당신에 대해 말하거나 생각하는 조그만 일에 그토록 큰 고통을 받는단 말인가? 의사들이여, 왜 당신들은 대중의 눈앞에 드러나면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는 짓거리들을 저지르는가? 당신들이 본받을 수 있도록 내 자신을 통해 훨씬 더 나은 모범을 보여주겠다. 가장 유익한 비판조차 당신들을 격분하게 만드는 이유는 당신이 그 비난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수많은 비방문(libelles) 속에서 calomnie(비방)를 당하고 있으며, 특히 어떤 발췌문과 독자에 대한 고지문에서는 더 이상 좋게 표현해 줄 수 없을 만큼 모욕을 당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온화함과 타고난 평정심을 전혀 잃지 않는다. 다른 이였다면 《기독교적 명상》의 경고문을 읽고 당신들처럼 미쳐 날뛰었을 것이며, 대중의 오해를 풀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내 처지를 정확히 알고 있으며, 나를 알고 내 이력을 아는 이들에게 굳이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를 들은 나로서는, 그 글을 그저 딱 한 번 읽어보았을 뿐 굳이 답변하는 수고를 들이지 않았다. 진실이 아닌 것은 구태여 변명할 가치조차 없다. 나의 침묵에 약이 바짝 오른 나의 적들은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그들은 《합리적 서재》라는 듣도 보도 못한 잡지의 어떤 권호에서 나를 공격했다고들 하는데, 나는 그것을 읽지도 않았고 읽고 싶지도 않다. 물론 읽는다 해도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겠지만 말이다. 결국 그들은 어떻게든 나를 걸고넘어지려 온갖 짓을 다 했지만, 내 품행과 도덕성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으면서 문학을 한답시고 나서는 자들에게 선고된 저 처참한 무명(obscurité)의 심연에서 빠져나오는 데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암스테르담의 친구들이 편지를 보내오기를, 그 발췌문 속에서 내가 아주 호되게 당하고 있다고 걱정하더라. 나는 그들에게 답장했다. "그럴 만도 하지, 왜냐하면 그들이 나를 비방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동료 의사들을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오직 쓴소리(médisance)만을 던졌던 나 역시 그들을 똑같이 호되게 몰아세웠으니까." 나는 타인을 향해 비판의 한계를 넘어섰고, 그들은 나를 향해 비방의 한계를 넘어섰다. 그들이 내게 입혔다고 믿는 그 거대한 해악의 실체란 고작 이 정도에 불과하다. 나의 원수들이 나보다 훨씬 더 큰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이 내심 유쾌할 뿐이다. 결국 타인의 의견이란 또 다른 이가 느끼는 감각이 내가 느끼는 감각과 완전히 다른 것만큼이나 나의 존재(être)와는 철저히 무관한 것이다. 단언컨대 나를 경멸하는 자는 나에 대해 나와 똑같이 생각하지 않으며, 나를 찬양하는 자 역시 나만큼 나 자신을 찬양하지는 못한다. 어떤 저작을 읽는 안목 있는 평론가는 저작을 정확한 저울 위에 올려놓고 무게를 달아보지만, 오직 저자만이 자신의 작품을 실제 무게보다 훨씬 더 무겁게 평가하는 법이다. 나는 이 딜레마에 주목하며, 의사들 역시 이 원칙을 지켰더라면 참 좋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타인이 나에 대해 가지는 생각은 참이거나 거짓이다. 만약 그것들이 참이라면, 내가 틀렸음을 인정하고 나 자신을 수정하면 그만이다. 만약 그것들이 거짓이라면, 모든 인간은 거짓말쟁이(omnis homo mendax)이므로 그것은 오직 그 거짓말을 저지른 자에게 되돌아갈 오류일 뿐이다. 그러니 그것이 고의가 아닌 착각(erreur)이라면 기꺼이 용서해야 마당하다. 만약 그 안에 악의가 도사리고 있어서, 아무런 공익적 이득도 없이 오직 남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안달이 난 자라면 그 비참한 자를 가엾게 여겨야지 어쩌겠는가? 나는 참으로 기이한 종자다. 나는 적들의 집요한 공격에 화를 내기보다, 그들의 무지와 멍청한 실수들을 보며 훨씬 더 많이 웃어제꼈다. 나는 모든 것을 이처럼 대한다. 슬픔, 역경, 고통, 그리고 삶의 소소한 굴욕들은 내게 전혀 가 닿지 않거나 기껏해야 아주 미미한 상처만 낼 뿐이다. 세상이 소리를 지르고 비난을 퍼부어도, 나는 그저 웃을 뿐이다. 악의와 시기심이 날리는 그 모든 화살들은 자연이 내게 부여하고 철학이 단단하게 보강해 준 온화함, 활기, 인내, 평정심, 인도주의, 요컨대 신학적 미덕은 아닐지언정 최소한 도덕적·정치적 미덕이라는 이 거대한 방벽을 단 한 발짝도 뚫지 못한다. 나는 폭풍우에 두들겨 맞으면서도 굳건히 서 있는 바위와 같았다. 세네카가 내 앞서 이 말을 했다는 사실은 전혀 개의치 않고 하는 말이다. 요컨대 고통, 질병, 비방 등에 대해서는 충분히 스토아주의자(Stoïcien)답게 대처하면서도, 쾌락과 건강, 그리고 찬사에 대해서는 어쩌면 너무나 에피쿠로스주의자(Epicurien)처럼 탐닉하는 셈이다. 만약 이것을 두고 행복한 기질(heureux tempérament)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이 행복이란 말인가! 먹구름이 태양을 가려 만들어내는 그늘과 추위 따위에는 전혀 방해받지 않은 채, 언제나 태양 광선이 뿜어내는 저 감미로운 온기만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유기체보다 더 축복받은 존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의 길을 계속 걸어가자. 행복이 문학(학문)이 가져다주는 명성에 있을 수 없다면, 학문을 닦는 그 자체의 즐거움에 행복을 둘러볼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공부가 우리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거나 세련된 취향, 유쾌한 이미지, 그리고 수천 가지 다양한 감정들의 매력을 통해 우리의 영혼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생각하는 것(penser)이란 감각하는 것(sentir)의 또 다른 방식에 불과하며, 일종의 겹쳐진 감각이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를 미소 짓게 만드는 독서와 명상에 전념하고 즐거운 것들을 생각하는 것은, 거의 끊임없이 유쾌하게 감각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인간 기계(L'homme machine)》의 저자로 하여금 그토록 열정적인 황홀경을 고스란히 쏟아내게 만든 정신적 육체적 쾌락(volupté)의 실체다. 그런데 왜 그 책이 그토록 험악한 대접을 받아야 했는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무엇이든 과장하지는 말자. 인간이 이러한 정신적 쾌락의 인상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유기체적으로 잘 조직되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멀리서부터 점진적으로 준비되어 있어야만 한다. 교육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이러한 즐거움을 전혀 느끼지 못했을 것이며, 교육의 다양성이야말로 이 영역에서 수많은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즐거움을 그리 오랫동안 유지하지도 못한다. 활은 언제까지나 팽팽하게 당겨져 있을 수 없으며, 바이올린 줄도 느슨하게 풀려버리면 활을 켜도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영혼의 근육들이 느슨해지기 시작하면 즐거움 역시 그에 비례해서 줄어든다. 수정체를 포도막 쪽으로 끌어당기는 모양체 인대(ligamens ciliaires)가 수축하는 데 지쳐버리면 눈 피로가 찾아오는 법이다. 온몸에서 가장 민감하고 가장 쉽게 발기하는 신경들을 보라. 단 한 번의 성교(commerce)가 끝나고 나면 그것들은 더 이상 빳빳하게 서지 못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살았다고 하기보다 죽은 것에 가까운 상태가 되니, 페트로니우스의 말마따나 그 부위는 장례를 치렀다(funerata est pars illa)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동시에 우리의 의지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목숨을 걸고 원했던 것을 더 이상 원하지 않게 된다. 인간이 어떤 여인에게 싫증을 느끼는 것과 정확히 똑같은 유기체적 이유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에도 싫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성적 결합이 주는 쾌락이 성욕과 격정이 감소함에 따라 줄어들듯, 학문이 주는 매력 역시 첫 한 시간 동안이 그 몇 시간 뒤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강렬하다. 문학이나 예술을 향한 격정 역시 다른 모든 욕망과 마찬가지로, 충족되지 않으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나는 뼈저리게 느낀다. 나는 감옥이나 폭정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인간의 정신(esprit)은 결코 사슬로 묶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처럼 혈기 왕성한 자가 만약 책도, 깃펜도, 잉크도, 종이도 가지지 못하게 된다면 참으로 가련한 처지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배적인 취향을 만족시킬 자유가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해지기엔 충분하지 않다. 채워야 할 너무나 많은 공허와 또 다른 욕구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공부를 지독히도 싫어하고, 자신의 직업에 눈곱만큼의 흥미와 즐거움도 느끼지 못해서 천 에퀴의 연금이 생긴다 해도 공부에 대한 불꽃이 전혀 가닿지 않을 자들의 안녕이 어떠할지 한번 상상해 보라. 천성(Minerve)을 거슬러 억지로 공부를 한답시고 자신들의 빈약한 기억 장치 속에 수천 가지 잡다한 지식들을 쑤셔 넣어, 만약 그들에게 조금의 판단력이라도 남아있었다면 그나마도 완전히 상실해 버렸을 저 미련한 천재들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자신들에게 아무런 득도 되지 않는 무익한 학문(그리고 정작 본인들보다 더 무식한 것들)에 자신을 통째로 갈아 넣어야만 하는 처지이기에, 그들은 자신을 둘러싼 책들을 가장 잔인한 원수로 바라본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앞서 언급했던 저 수많은 행복한 무지렁이(ignorans)들을 보라! 그들은 명예도 없고 아름다운 지식을 습득하는 즐거움이나 지적 취향도 없지만, 오히려 지식인들을 향해 격멸을 퍼부으며 복수한다. 자신들은 오직 동물적 본능(instinct)만으로 막대한 부를 거머쥔 반면, 소위 똑똑하다는 자들은 그 잘난 이성을 부리다가 파멸의 벼랑 끝으로 굴러떨어졌다는 사실을 보며, 자신들의 가치가 지식인들보다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고(오히려 훨씬 낫다고) 굳게 믿으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결론을 내리자면, 키케로나 소플리니우스, 그리고 내가 앞서 언급했던 저자들처럼 행복을 정신의 쾌락이나 예술의 뒤를 따르는 명성 속에 두었던 자들은 자신들의 취향에 매몰되어 과장과 열광에 빠진 것이며, 결국 한 번에 두 가지 오류를 범한 셈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온당한 논리를 거슬러 학문의 즐거움이라는 극히 제한적이고 특수한 영역을 무리하게 확장하고 일반화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빚어낸 경이로운 창조주께서 모든 살아 숨 쉬는 피조물에게 그토록 보편적으로 허락하신 권리, 즉 행복해질 수 있는 능력과 각자의 방식 및 환상에 따라 행복을 누릴 권리를 도리어 제한해 버렸기 때문이다. 각자는 자신만의 쾌락에 이끌리는 법이다(Trahit sua quemque voluptas). 그저 공부에서 얻는 즐거움 때문에 행복을 일반적으로 문학(학문)을 가꾸는 일에만 한정 짓는 것은, 세상의 수많은 좋은 것들을 도외시하고 자연을 모방하기는커녕 조롱하는 짓이다. 행복을 명성과 평판의 마차에 매달아 놓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의 손에 장난감을 쥐여주거나 나팔이 울려 대는 소란 속에 행복을 내맡기는 것과 다름없다. 이제 그림의 나머지 부분을 마저 보여주고, 세네카가 뒤에 숨어있는 그 커튼을 완전히 걷어젖히기로 하자. 수많은 이들이 부( riches)와 쾌락 없이도, 지식과 명성 없이도, 무엇보다 저 이름 없고 평온한 '평범함(médiocrité)'의 품 안에서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이 행복에 지극히 가깝다고 치켜세웠던 저 세속적인 좋은 것들을 행복으로부터 이토록 멀리 떨어뜨려 놓음으로써, 나는 오히려 그것들에게 그들이 받을 자격이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명예를 나누어 준 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명성이 가진 저 아첨하는 수많은 입술에는 물론이거니와, 새로이 우리 활에 먹여진 이 줄(부유함)이 번쩍이는 저 아름다운 황금빛 색채에도 더 이상 현혹되지 말고 그것의 실체를 검증해 보자. 하지만 우리는 타인에게 존경받는 이점을 분명 기쁘게 받아들이면서도, 이제부터는 한낱 허망한 소음을 내는 즐거움을 위해 우리의 평정심을 희생시키지 않을 것이듯, 신들 중 가장 강력한 신(황금)을 충분히 대접하지 않는 자들의 의견에 멍청하게 속아 넘어가지도 말자. 만약 황금이 길들여주지 않는다면, 주피터가 내리는 황금비가 그 굳은 살을 부드럽게 녹여주지 않는다면, 미덕이나 철학이란 대체 얼마나 사납고 거친 동물에 불과하겠는가? 그렇기에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것을 겉으로는 필사적으로 적대시했던 저 위선자 세네카조차, 부유하게 사는 것은 겨울날 태양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아름다운 가로수길을 산책하는 것만큼이나 감미롭고 유쾌한 일이라고 인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고의로 회피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저 선명한 대조 속에서, 가난(pauvreté)이란 결국 차가운 한기가 몰아치는 음지일 뿐이다. 아무리 최고선(souverain bien)을 내면화하고 자신의 온갖 미덕으로 몸을 감싼다 한들, 미덕이나 철학은 자신들이 가진 그 모든 노를 저어보아야 우리를 원하는 항구로 인도하지 못한다. 그 잘난 용기를 품고 있는 영혼조차 북풍이 불어와 꽁꽁 얼려버리는 것을 막아주지 못하는, 참으로 가련한 겨울 외투(외양)일 뿐이다! 하지만 어쩌면 스토아주의자들의 영혼은, 라이프니츠주의자들의 영혼이 그러하듯 신체(corps) 바깥에 살고 있어서, 동일한 조화가 만들어내는 상상 속의 법칙에 지배받지 않는 모양인가? 게다가 고통이 악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고통의 축소판에 불과한 추위 따위는 어쩌면 하나의 선(善)이 될지도 모를 일 아닌가? 루키아노스가 조롱하도록 내버려 두자, 그의 그 경쾌함을 흉내 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니 말이다. 세네카는 현자 역시 부자가 될 수 있으며, 마땅히 부유함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동의한다. 즉, 현자는 부자가 되기 위해 비열한 짓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양팔을 벌려 환대하며 받아들인 부에 대해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현자는 부유함에게 일종의 '환대'를 베풀어, 가난한 이들과 이름 높은 불행한 이들이 그 부를 함께 나누도록 할 뿐이다. 가치 있는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것은 오직 똑같이 가치 있는 인간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자, 혹은 부를 올바르게 쓸 줄 아는 자라면 누구나 불행한 이들을 구제하고, 미덕을 고무하며, 재능 있는 이들을 격려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가치를 드높일 것이다. 요컨대 재물을 주인이 아니라 집사(économe)의 태도로 다스릴 것이다. 그러한 인간과, 운이 좋아서 부자가 되자마자 오만방자해져 자신에게 가장 이질적이고 하등 자랑할 것도 못 되는 외적인 것들에 지극히 우쭐거릴 뿐, 자신이 누리는 편안함(commodités)을 그 누구와도 나누려 하지 않는 저 비루하고 천박한 영혼들 사이에 대체 얼마나 커다란 차이가 존재하는가! 그러나 자신의 변덕에 따라 재산을 탕진하며 수많은 가련한 이들의 울음소리를 자신의 유흥 소리로 덮어버리는 자가 고작 미치광이에 불과하다면, 재물을 가지고 인간들을 괴롭히며 브리타니쿠스에 나오는 나르시스처럼 자신이 초래한 불행 속에서 행복을 찾는 자는 참으로 비겁한 자일 뿐이다. 사회의 공익을 실천하고, 자신이 가진 기쁨으로 타인의 마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부유한 자의 마땅한 의무다. 만약 그가 이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동정심도 없고 너그럽지 못하며,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라 해도 전부 구제할 수 없을 만큼 가득한 저 수많은 가난한 이들을 보고도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재산이라는 신탁은 애초에 잘못 맡겨진 것이며 이보다 더 최악의 손에 들어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부유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내 집에 아첨꾼들과 거짓 친구들의 무리를 거느리기 위함이 아니다. 그들은 뻔뻔스럽게도, 아니 차라리 배신감 가득하게도, 운명이 비껴가자마자 내게 곧바로 등을 돌릴 자들이다. 내가 거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싶다면, 그것은 오직 타인에게 은혜를 베푸는 즐거움이라는 저 아름다운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일 뿐이며, 관대함(générosité)이야말로 내가 부릴 유일한 사치일 것이다. 나는 부를 결코 경멸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쓰고 나누어야 하는지 정확히 알 것이다. 나는 인색함(avarice)이야말로 모든 악덕의 근원이라고 바라본다. 너그러움이 없다면, 대체 무슨 수로 미덕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내가 꿈꾸는 행복은 마차, 시종, 사냥개, 그리고 마차 뒷부분이 주저앉아 버릴 듯 빽빽하게 매달려 있는 저 엄청난 가마꾼들의 무리를 거느리는 데 있지 않다. 내게는 그토록 많은 가축이나 하인들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나는 내 문 앞에 거짓말쟁이 스위스인 문지기를 세워두고, 정직한 인간이라면 전혀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채권자들(왜냐하면 정직한 이는 오직 갚아주기 위해 빚을 지기 때문이다)의 출입을 막아서는 짓 따위로 내가 미화된다고 믿지 않는다. 만약 그 문지기의 미창과 콧수염이 모두에게 공포를 주어 '죽음(la mort)'이 들어오는 것까지 막아줄 수 있다면 또 모를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 호라티우스가 라틴어로 노래했고, 말레르브가 프랑스어로 똑같이 읊었듯이 말이다. 초가집 지붕 아래 가난한 이도, 죽음이 만든 법칙 앞엔 복종해야 하네. 루브르 궁전 성문을 지키는 파수꾼들도, 우리 국왕의 목숨을 지켜내진 못하네. 이 모든 사치와 부질없는 과분함(superflu)을 멀리 치워버려라. 현자는 그것을 오직 경멸하기 위해서만 알 뿐이다. 아! 허세와 허영심이 만들어낸 욕망들을 채우느라 자연이 부여한 안녕의 필요조건들을 끊임없이 늘려가는 자들은 참으로 백번 저주받아 마땅한 가련한 자들이다! 행복해지기 위해 너무나 빈틈없이 딱 들어맞는 필수품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하더라도, 최소한 다음과 같이 말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삶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적은 것(peu de choses)만으로도 내게는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추방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했지만, 내게는 그 정도의 지독한 향수병은 없다. 나는 조국과 행복이 언제나 함께 갈 수 있다고 믿으며, 실제로 내가 편안하게 잘 지내는 곳이 곧 나의 조국이라 믿는다. 나만큼이나 깊은 감사함을 품고 이 진리를 뼈저리게 느끼는 이에게서 이 생각을 바꾸기란 무척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인간은 자신이 가진 것을 최소한 '유지'하기라도 바라며 전전긍긍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공포(crainte)만 없다면, 철학자는 온전히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날이라 할지라도, 가장 찬란한 희망의 빛줄기로도 쉽게 걷어내기 힘든 조그만 먹구름에 의해 흐려지지 않는 날이 과연 단 하루라도 존재하겠는가? 제아무리 자기 소유의 자산으로 유유자적 살아가는 자라 할지라면, 자신의 소작인이 언제나 빚을 갚을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대체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겉보기에는 가장 견고해 보이는 번영이라 할지라도, 언제든 폭풍우로 돌변할 수 있는 일시적인 평온함으로 바라보자. 지금 당장 닻을 내리고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배는 필연적으로 난파당할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없어졌을 때 지독하게 곤란해질 물건들에 평소에 너무 마음을 붙이지 않는 연습을 조금씩 해 나가자. 그래야만 진정 운이 없어 그것들을 빼앗기게 되더라도 미련과 후회를 덜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짊어질 준비가 미리 되어 있다면, 짐의 무게는 절반으로 가벼워진다. 내가 지금 가난에 대해 말하는 이 원칙은, 앞서 내가 부유함과 권세의 한가운데서조차 때때로 지독하게 무겁게 다가온다고 말했던 '삶의 멍에'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바로 그럴 때일수록, 자신의 사슬을 끊어버리는 나약한 유혹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내면에 더 커다란 힘을 채워 넣어야만 한다. 고통과 revers(역경)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아는 것에 비하면, 의기양양하게 죽는 법을 아는 것 따위는 훨씬 더 보잘것없는 영광일 뿐이다. 게다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 '마지막 순간의 영광'을 쟁취할 수 있는 기회란 지극히 드물기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는 법을 배우기보다 끈질기게 살아내는 법을 배우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값지다. 사회의 안녕을 위해서도 너무나 중대한 이 대목만큼은, 내가 필연적으로 다시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운명(fortu)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라면 마땅히 자연(nature)의 은총을 받을 자격도 있으며, 따라서 volupté(쾌락/유희)을 누릴 자격도 있다. 세네카가 그토록 격렬하게 쾌락을 반대하는 이유는 쾌락주의자가 좋은 친구도, 훌륭한 군인도, 올바른 시민도 될 수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지만, 이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소리다. 경험이 이를 증명한다. 쾌락이 그것을 즐기는 자들을 언제나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쾌락에 많은 것을 바치지만, 모든 것을 바치지는 않는다. 또한 쾌락의 지배가 아무리 강력할지라도, 이성적인 영혼 안에서는 의무와 즐거움이 너무나도 조화롭게 결합하므로 서로에게 해를 끼치기는커녕 도리어 서로에게 힘을 보태어 준다. 쾌락을 느끼고, 음미하고, 어떤 면에서는 그것을 완성하는 예술은 프랑스인들에게 꽤 보편적으로 허락되어 있는데, 이는 어쩌면 사람들이 그것을 하나의 결함으로 치부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토록 쾌락을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해서 우정을 나누는 능력이 떨어지는가? 그들의 마음에 조국을 향한 사랑이 덜 새겨져 있는가? 명예나 국왕이 자신들을 부를 때 그들이 위험을 마다하는가? 에피쿠로스의 쾌락이란 그저 강인한 육체 위에 걸친 여성의 옷과 같다고 우리 저자(세네카)가 비유적으로 말했듯이, 나 역시 같은 의미에서 우리 프랑스의 귀족들이 옴팔레의 옷을 입고 헤라클레스의 용기를 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볼테르와 이 민족을 아는 모든 이들이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할 것이다. 이 위대한 천재는 프랑스인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프랑스 궁정 신하들의 성품이 그러하니, 그들은 감미로운 안락의 품 안에서 자라나서도 위험을 향해 달려간다. 궁정에서는 비굴한 아첨꾼일지라도, 마르스의 전장에서는 영웅이 된다. 세네카가 쾌락의 향유를 절대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아니다. 당신도 그 수레국화들을 알 것이다. 마치 풍자 가요(vaudeville)의 수명처럼 짧게 피어나는, 세레스 여신의 장식품이자 씨앗과 바람의 우연에 의해 밀밭 한가운데서 태어나는 그 꽃들 말이다. 세네카는 은연중에, 덕스러운 인간이 걸어가는 길 위에도 이처럼 가끔 쾌락이 자라나곤 한다고 넌지시 말한다. 쾌락을 굳이 찾아 헤매지 않더라도 그것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길을 지나가다 꽃 한 송이를 꺾듯 자연스럽게 취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따르면, 쾌락이란 결국 미덕의 꽃이자 즐거움의 정수(eſprit)인 셈이다. 화학적 표현을 빌리는 것을 허락한다면, 그것은 미덕의 품 안에서 훨씬 더 아름답고, 순수하며, 더 정결하게 배양(germer)되는 것이다. 꽃의 향기를 맡는 것을 허락하는 장치라면 그 꽃의 사용을 완전히 금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찌 그리 무심하게 그 감미로운 향기를 들이마시기만 해야 한단 말인가? 모든 식물에 퀸테센스(quinteſſence, 정수)나 부르하버가 말한 '에스프리 렉퇴르(eſprit recteur, 지배적 정수)'가 존재하듯 쾌락에도 그것이 있다면, 그저 꽃을 취해 무심하게 냄새만 맡는 것으로는 그 황홀한 정수를 온전히 음미할 수 없다.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죄악에 가까운 무감각(indolence)이 아닌가? 더욱이 우리의 행복을 위해 더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장미를 그대로 시들게 내버려 두는 것은 일종의 잔인함(inhumanité)이 아닌가? 스토아주의자들의 저 냉담함은 치워버리자. 자연이 베푼 은혜는 저 배은망덕한 자들이 거부하는 격정적인 애정과 깊은 감사함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나는 행복이 오직 쾌락에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는 내 감각에 스며든 그 모든 황홀한 취기를 펜 끝으로 쏟아내기도 했지만, 이제는 사이렌의 덫에서 벗어나 (어쩌면 타고난 기질 덕분에) 한층 더 절제된 태도에 동의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즐거움의 아버지인 오직 '필요(beſoin)'만이 나를 부르고, 말하자면 내 쾌락의 시간을 알리는 종을 울리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감각의 즐거움이 행복이라는 영속적인 상태를 구성하기에는 본질적으로 너무나 짧고 드물게 찾아올지라도, 그것을 최소한 번뜩이는 '행복의 번개'로 바라보자. 그것이 결여된다면 삶의 기쁨은 불완전하고 불구가 될 것이며, 오직 그 상처를 부드럽게 다독이고 아물게 할 유일한 고약(baume)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마음의 수많은 자잘한 상처들을 치유할 수 없을 것이다. 자꾸만 자극받기를 좋아하는 상상력이 만들어낸 욕망을 진짜 생리적 '필요'로 착각하지 말자. 그렇게만 된다면 대식가도, 술고래도, 방탕한 자들도 훨씬 줄어들 것이다. 다만 자연의 것은 자연에게 돌려주자. 목이 마르면 마시고, 배가 고프면 먹는 법이다. 그리고 우리는 가끔 이 동일한 원인(신체적 욕구)이 자아내는 이중의 효과를 경험하곤 한다. 어떤 인간인들 특정한 쾌락에 굶주리고 목마르지 않을 때가 있겠는가? 그것에 몸을 내맡기지 못해 영혼 속에 얼마나 많은 먹구름과 불만이 피어오르는가? 오직 쾌락만이 그것을 말끔히 흩어버릴 수 있다. 물론 기질이 약한 체질의 인간들은 건강을 지키고 다른 즐거움을 더 잘 누리기 위해 이를 절제할 수 있으며, 오히려 절제해야만 한다는 것을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현명하게 다스려지기만 한다면, 쾌락은 다른 필수적인 욕구들만큼이나 절대적인 필요(néceſſité)를 지니며, 자연은 그 욕구를 만들어내기 위해 다른 본능들과 똑같은 생리적 기제를 사용했다. 그렇기 때문에 켈수스나 그의 주석가 롬미우스, 브네트, 부르하버, 그리고 가장 엄숙한 철학자들과 의사들조차 자신들의 저작에서 쾌락을 권장하고 사랑에 관한 참되고 현명한 가르침을 주는 것을 전혀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 역시 건강에 관해 썼던 서한들의 마지막 편지에서 그들의 전례를 따랐었다. 그러나 어떤 유별나게 엄격한 검열관이 내가 가진 유일한 사본을 마음대로 폐기해 버렸는데, 거기에는 한층 새로워진 브네트의 이론과 더불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 주제에 대해 당대 최고의 저자들이 남긴 핵심 정수가 담겨 있었다. 행복이 일반적으로 감각의 쾌락 속에 놓여서는 안 된다 할지라도, 어떤 이들에게는 감각의 만족이 너무나 시급한 필요여서, 성교(coït)에 지독하게 굶주리고 목마른 나머지 매일같이 되풀이해야 하는 이 성적 행위(acte vénérien) 없이는 비참해지고 지독한 동정의 대상이 되고 마는 신체들이 존재한다. 반대로 그들의 타고난 기질이 마음껏 내달리도록 내버려 두면, 그들은 쾌락 속에서, 그리고 쾌락 그 자체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방탕과 어리석음, 질서 없음의 한가운데서도 얼마든지 행복하다. 이에 대해 무슨 증거를 더 원하는가? 그들의 하루하루는 거의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흘러가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그저 '느낄' 뿐 '사유(réfléchiſſent)'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나 유쾌하고 만족스러운 그들은 오직 기쁨만을 호흡하며,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그 기쁨을 퍼뜨린다. 그것은 말하자면 우리 마음의 통용 화폐이며, 지성(eſprit) 그 자체보다 훨씬 더 유쾌하고 모든 사람의 손이 쉽게 닿는 지성의 대용품이다. 그러니 어찌 그것이 모든 축제와 연회의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쁨은 그들과 함께 걸터앉아 손님들을 향해 미소 지으며 모두를 즐겁게 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모임 속에 기쁨을 유통시키고, 말하자면 그것을 거품 내어 다양한 고급 와인과 함께 긴 모금으로 들이켜게 만든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빚더미에 올라앉고 명예를 완전히 상실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미덕과 정직함이란 우리 존재의 본질과는 전혀 무관한 것들이며, 행복의 토대(fondemens)가 아니라 그저 겉치레 장식(ornemens)일 뿐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하다. 반대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지극히 덕스럽고, 정직하며, 정결하고, 절제하면서도 동시에 불행하게 살아가는가? 그들의 솔직함, 현명함, 자애심은 그야말로 철저하다. 그러나 그들은 고독이 주는 권태와 성격의 딱딱함, 그리고 단 한 번도 미소 짓지 않는 이성(raiſon)이라는 숨 막히는 짐을 평생 질질 끌고 다닐 뿐이다. 진실하고 신뢰할 수 있는 인간들인 만큼 딱딱하고 가혹하며, 엄숙하고 침묵을 지키는 만큼 차갑고 우울하다. 그들의 멜란콜리와 흑담즙질 같은 안색은, 그 모습을 보기만 해도 당황하여 흩어지고 겁먹어 달아나는 유희와 웃음을 쫓아내 버린다. 사람들은 그들을 존경하지만 동시에 멀리하는데, 이것이 바로 미덕의 가혹한 운명이다. 반면 사람들은 경멸하면서도 매력적인 악인들을 열렬히 찾아 헤매는데, 이것이 바로 세련된 사교성(urbanité)과 우아함의 힘이다. 남을 기쁘게 하는 기술은 행복으로 가는 거대한 지름길이다. 여기 한 부류의 인간들은 한낱 몸을 파는 창녀(P)만큼도 사유하지 않고 평판 따위는 쥐뿔도 신경 쓰지 않음으로써 행복을 거머쥔다. 저기 다른 부류의 인간들의 불행은 너무 많은 사유를 하는 데서, 그리고 오직 어둡고 슬픈 대상을 향해서만 생각이 뻗어 나가는 데서 비롯된다. 자연이 그 꽉 막힌 상상력 앞에 슬픈 장막을 드리우듯 말이다. 후자의 인간들에게 대체 무슨 구원의 수단이 있겠는가? 그저 순간을 모면하는 몇 가지 임시방편뿐이다. 마시고 나면 몸을 해치는 포도주, 극장, 유흥, 오락 따위지만 이마저도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극도로 유쾌한 자들의 사회는, 그렇지 못한 자들을 오히려 더 깊은 비참함으로 밀어 넣을 뿐이다. 당신은 저 방탕한 자들이 고작 쾌락을 맛보고 달콤한 가려움(doux prurit)을 탐닉하는 것밖에 모르는 족속들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그것이 그들을 덜 행복하게 만드는가? 그들 역시 각자의 동물적 본능과 취향에 따라 자신들의 안녕을 추구하고 있는 것 아닌가?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유기적 감각 기관(organes)이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종류의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 아닌가? 모든 악인(méchans)의 사정도 이와 정확히 같다. 만약 그들이 아무런 양심의 가책(remords) 없이 악을 저지를 수만 있다면, 그들 역시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나는 감히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하겠다. 범죄와 너무나 친숙해진 나머지 악덕이 자신에게 미덕으로 느껴져 어떠한 가책도 느끼지 않는 자가, 선행을 베풀고 나서도 이내 그것을 후회하느라 선행의 가치를 모두 잃어버리는 어설픈 인간보다 훨씬 더 행복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평정심(tranquillité)이 가진 경이로운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흔히 불행한 자라 불리고, 사회적 기준에서도, 그리고 스스로의 눈앞에서도 진정 불행한 처지에 놓인 자여, 그렇다면 너 역시 평온해질 수 있다. 너는 그저 사유를 통해(만약 사유에 그만한 힘이 있다면), 혹은 그보다 훨씬 강력한 반대 성향의 습관을 들임으로써 양심의 가책을 완전히 질식시켜 버리면 된다. 만약 네가 애초에 가책의 기반이 되는 도덕 관념들 없이 자라났더라면, 이런 내면의 적들과 싸울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너는 대중의 신뢰나 증오뿐만 아니라 너 자신의 목숨까지도 가볍게 경멸해야 한다. 그렇게만 한다면, 나는 단언컨대 네가 아버지를 죽인 자(parricide)이든, 근친상간을 저지른 자이든, 도둑이든, 흉악범이든, 악명이 자자하여 정직한 이들의 마땅한 증오 대상이 될지언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행복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어둡고 끔찍한 행동일지라도 (우리의 가설에 따르면) 범죄자의 영혼에 그 어떤 죄의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면, 대체 무슨 불행이나 슬픔이 너를 괴롭힐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만약 네가 계속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이 점을 명심하라. 현실의 정치(politique)는 나의 이 철학만큼 관대하지 않다. 사법(juſtice)은 정치의 딸이며, 처형인과 교수대가 언제나 정치의 명령을 대기하고 있다. 네 양심이나 신들을 두려워하기보다, 차라리 저 교수대를 훨씬 더 두려워하라. 인간을 다스려야 했던 최초의 통치자들은 도덕과 종각이라는 이 나약한 이중의 고삐가 가진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렇기에 신체의 건강을 위해 썩어 들어가는 신경을 절단하듯, 나머지 시민들을 보존하기 위해 시민의 일부를 정당하게 목 졸라 죽여야 하는 잔혹한 필연성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니 배은망덕한 자연이 너에게 그것을 허락하는 한, 잔인하고 비겁한 군주여, 너의 폭정(tyrannie)을 긴 모금으로 마음껏 맛보고 음미하라. 에로스트라투스는 불을 질러 자신을 불멸로 만들고자 했으니, 너는 피를 흘려 너 자신을 불멸로 만들어라. 쾌락의 대가가 새로운 유희를 고안해 내듯 끔찍한 고문들을 정교하게 발명해 내고, 가능하다면 그 안에서 똑같은 즐거움을 찾아라. 네 권력 안에서 네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선은 오직 악을 행하는 것뿐이며, 선을 행하는 것은 도리어 너에게 극형과 같은 고통이 될 것이다. 나는 너를 이끄는 그 저주받은 성향으로부터 너를 구태여 건져내지 않겠다. 내게 어찌 그럴 힘이 있겠는가? 그것이 바로 네 비참한 행복의 원천인 것을. 곰, 사자, 호랑이들이 다른 동물들을 찢어 죽이기를 좋아하듯, 그들만큼이나 사나운 네가 똑같은 본능적 경향에 굴복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토록 대중의 재앙을 먹고 자라는 너를 나는 깊이 동정한다. 하지만 너 같은 괴물로부터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국가를 구원해 낼 만큼 덕스러운 단 한 명의 인간조차 찾아볼 수 없는 저 비참한 국가의 운명은 훨씬 더 동정 받아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쾌락주의자여(외과 의사가 텅 빈 혈관의 압력을 맞추듯, 나 역시 너의 나약함에 눈높이를 맞추어 말하겠다), 생생한 즐거움 없이는 결코 행복한 삶에 도달할 수 없는 자여, 너의 영혼과 세네카 따위는 저 멀리 던져버려라. 스토아주의의 그 모든 미덕이란 너에게 한낱 유행가 가사에 불과하니, 오직 너의 '육체(corps)'에만 신경을 써라. 네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육체와 구별할 가치조차 없다. 세상의 편견들, 고리타분한 학자들, 광신도들이 너를 향해 무기를 들고 일어날 것이며, 온 세상의 모든 원소들이 그들에게 합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바람과 우박, 해방된 폭풍우가 몰아친들, 자신의 연인 클로리스의 품에 안겨 있던 티불루스에게 그것이 무슨 상관이었겠는가? 그 자연의 광포함은 도리어 폭풍을 비웃는 그의 행복을 더해줄 뿐이었다. 그러니 기회가 찾아올 때마다, 그리고 그것이 닿는 모든 곳에서 그 좋은 시간을 남김없이 붙잡아라. 현재를 즐기고, 이미 사라진 과거는 깨끗이 잊어버리며, 오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라. 밭 바깥에 뿌려진 밀알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밀알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자연의 거대한 질서 속에서 사라진 영혼의 한 조각이란 바다에 떨어진 물 한 방울에 불과하다. 자연을 즐겁게 하는 모든 것은 즐거움이며, 자연을 거스르는 것은 오직 고통뿐이다. 사정과 음탕한 유희가 라이벌처럼 번갈아 찾아와 밤낮으로 너를 쾌락 속에 녹여버리게 만들고, 가능하다면 네 영혼을 네 육체만큼이나 끈적하고 음란하게 만들어라. 결국 네게 다른 구원의 수단이 없다면, 기왕 장만된 무기들을 철저히 이용하라. 마시고, 먹고, 자고, 코를 골고, 꿈을 꾸어라. 만약 네가 아주 가끔 사유를 해야 한다면, 거나하게 취한 술기운 사이에서만 사유하되, 오직 현재 이 순간의 즐거움이나 바로 다음 시간을 위해 예비해 둔 욕망만을 생각하라. 혹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쾌락의 위대한 예술에서 정점에 도달하고 싶다면, 과식과 방탕조차 너를 채우지 못해 오물과 infamie(치욕)가 너의 몫이 된다 할지라도, 저 돼지들처럼 진흙탕 속을 뒹굴며 그들의 방식대로 행복해져라. 나는 그저 네가 네 자신에게 속삭이고 이미 행하고 있는 바를 그대로 말해줄 뿐이다. 내가 다른 고결한 어조를 취해 보았자 시간 낭비이자 헛수고에 불과할 것이다. 방탕한 자에게 절제를 논하는 것은, 폭군에게 인류애를 논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내가 범죄를 선동한다고 말하지 말라. 왜냐하면 나는 범죄를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범죄 속에 처한 자에게 평온(repos)을 권할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거짓되고, 교활하며, 위험하고, 배신을 일삼는 동물처럼 보인다. 인간은 유년 시절부터 주입받아 자연법과 양심의 가책의 토대를 이루는 관념들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혈기와 정념의 분출을 따르는 듯하다. 내가 하는 모든 말의 핵심은 바로 이 한마디로 축약된다. 나의 목적은 인과관계를 따지고 그 원인을 추적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초래될 결과들은 잠시 사유에서 배제하는(abstraction) 것이다. 설령 결과를 배제한다 한들, 그 결과들이 현실에서 더 골치 아파지거나 진압하기 까다로워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수많은 악인이 자신들의 행위에 반하는 온갖 도덕적 편견 속에서 자라났음에도 늘 불행하지만은 않다면, 만약 그들이 그 편견의 멍에를 완전히 떨쳐버릴 수 있거나, 혹은 애초에 그 멍에를 멘 적조차 없다는 이중의 가설을 세워볼 때, 그들이 결과적으로 훨씬 '덜' 불행해질 것이라는 점은 너무나도 자명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나는 내 눈에 비친 실재를 말하는 것이며, 오직 하나의 철학적 가설(hypothese)을 제시할 뿐이다. 신이시여 절대 그런 일이 없기를! 나는 내 기질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악행(méchanceté)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악행을 그저 동정할 뿐인데, 왜냐하면 때로는 길들이기가 너무나 어렵고 심지어 불가능하기까지 한 인간의 '유기적 구조(organisation, 신체 조직)' 자체에서 그 악행의 핑계와 원인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재갈을 물려도 소용없이 날뛰는 동물은 비단 말(馬)뿐만이 아니다. 각자 자기 자신을 면밀히 검토해 보라. 과거에 부렸던 그 불같은 분노, 복수심, 말다툼, 그리고 자신을 휩쓸고 가버렸던 그 수많은 감정의 격동을 돌이켜본다면, 자신 역시 남들과 똑같이 성난 한 마리 말에 불과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격정적이고 폭력적인 인간은 누구나 그런 말과 같다. 하지만 세네카를 흉내 내어 내게 이렇게 따지는 자가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저 악덕과 범죄를 향해 철퇴를 내리치는 매서운 문체를 휘두르지 않는가?" 나는 내 임무도 아닌 일에 얽매일 의무가 없다. 그런 일은 풍자 작가들이나 설교가들의 몫으로 남겨두련다. 나는 도덕을 논하지도, 설교하지도, 열변을 토하지도 않으며, 그저 '설명(explique)'할 뿐이다. 나는 열성적인 시민이며 이를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지금 글을 쓰는 것은 시민의 자격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철학자'로서다. 철학자로서 바라보건대, 악명 높은 도둑 카르투슈가 카르투슈로 태어난 것은 피루스 왕이 피루스로 태어난 것과 다름없다. 한 사람은 은밀한 힘으로 훔치고 죽이도록 만들어졌고, 다른 한 사람은 공공연한 군사력으로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졌을 뿐이다. 살육과 피에 대한 갈증을 타고난 자에게 그 어떤 훈계와 조언도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들은 조언을 귀담아듣고 심지어 박수를 갈채할지는 몰라도, 결코 그것을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철학이 내게 들려주는 속삭임이다. 반면 대중을 향한 사랑은 내게 전혀 다른 것을 속삭인다. 인간의 운명이, 말하자면 인간 자신의 손이라는 이토록 악랄한 손안에 쥐여져 있다는 비참한 실재를 나는 깊이 애도한다. 내가 말하는 이 모든 것을 스스로 믿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서글프지만, 내가 믿는 바를 솔직하게 말하는 것에 대해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얼핏 보기에 몹시 혐오감을 자아내는 이 표면을 뚫고, 통찰력(odorat)을 지닌 현명한 이들이 그 껍질(écorce)을 파헤친다면, 나의 철학이 결코 사회의 파멸과 붕괴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 논점에 대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본다. 부디 이 점을 유념해 주기를 바라며,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나와 저자로서의 나를 명확히 구분해 주길 바란다. 나는 악인들을 대담하게 충동질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애의 마음으로 그들을 동정하고, '이성(raison)'을 통해 그들의 내면을 평온하게 가라앉혀 줄 뿐이다. 내가 그들의 마음에서 양심의 가책이라는 무거운 짐을 덜어준다고 해서, 그들이 사회에 훨씬 더 무겁고 해로운 부담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회는 고유의 관습과 법률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침해당했을 때 휘두를 수 있는 무기를 쥐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사회를 대신해 복수하는 자도 아니요, 사회를 떠받치는 기둥도 아니다. 정의의 여신 테미스는 내게 저울을 맡긴 적이 없으며, 악덕과 미덕, 처벌과 보상을 저울질하라는 임무를 부여하지도 않았다. 극작가 크레비용이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테스의 잔혹한 비극을 썼다고 해서 그 인격이 사악해지는 것이 아니듯, 나 역시 절대적인 악덕의 메커니즘을 파헤쳐 해체하려 했다고 해서 나의 미덕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려 한다고 해서, 내가 곧 가책을 부르는 범죄를 저지를 인간이라는 뜻은 아니다. 인간의 본질을 냉정하게 평가할 줄 안다고 해서, 내가 인간을 위해 봉사하기를 거부하거나 사회의 파멸을 부추긴다는 뜻 역시 아니다. 오히려 나는 사회에 해를 끼치는 모든 행위를 혐오한다. 나는 정치가 동원하는 도덕적 무기(양심의 가책)가 교수대나 단두대만큼이나 무시무시하고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아니, 그보다 차라리 내가 인간들이 서로를 해치지 못하도록 막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인간들을 마치 최상급의 반죽처럼 주물러서, 조국의 안전과 이익, 그리고 번영에 완전히 들어맞는 고결한 존재들로 빚어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게만 된다면 인간들은 얼마나 고귀하고, 유순하며, 다정하고, 사심이 없고, 너그럽고, 동정심이 넘치겠는가! 시기질환도 없고, 오직 사회에 유용한 존재가 되겠다는 고결한 야망만을 품은 채, 자신의 원수가 누리는 부와 성공마저도 온전히 축복하며 모든 것에 만족할 텐데 말이다! 하지만 내가 상상하는 그러한 가상의 사회에서는 애초에 '원수'라는 존재 자체가 없을 것이다. 그 사회는 오직 하나의 거대한 가족만을 형성할 것이며, 그 안에서 모든 구성원은 평온하고 덕스러운 쾌락(volupté)의 품 안에서 순수하고 맑은 나날을 보낼 것이다. 마치 다공성 돌 틈 사이로 걸러져 한층 더 맑고 아름다워진 샘물이 푸른 초원 위를 너무나 자연스럽고 완만한 경사를 따라 흘러가기에, 정말로 대지를 적시는 일 자체를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이는 저 맑은 시냇물처럼 말이다. 그것이 바로 올바른 시민이 살아가는 삶의 진정한 초상이다. 나는 이러한 종류의 변론과 변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기에 잠시 곁길로 샜으며, 이제 마침내 최종 결론에 도달하고자 한다. 인생의 모든 행위가 에피쿠로스가 'volupté(쾌락)'라 명명했던 저 내면의 만족감(contentement interieur)을 위해 희생된다면, 결국 그 쾌락이야말로 최고선(souverain bien)을 이루는 행복의 원천이라고 결론지어야 한다. 따라서 고대 철학자들의 모든 견해는 결국 이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되며, 본질적으로 우리의 생각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에피쿠로스는 선하거나 악한 행위를 저지르는 원인이 언제나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갈망에 있다고 말했으며, 나는 우리를 결정짓는 것이 다름 아닌 *'안녕에 대한 감각(sentiment du bien-être)'이라고 말한다. 이로부터 나는 행복이란 쾌락과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 즉 선인과 악인 모두의 손이 닿는 곳에 공평하게 놓여 있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가장 덕스러운 자라고 해서 더 행복한 것은 아니다. 만약 그들이 더 행복하다면, 그것은 오직 자신들의 존재 방식과 행위를 스스로 기쁘게 느끼고 음미하기 때문일 뿐이다. 나는 또한 신경계의 이러한 호의적인 변형(modification des nerfs)이 결여된다면 선한 이들조차 얼마든지 불행해질 수 있는 반면, 오직 자기 자신만을 조국이자 친구, 정부, 아내, 자식으로 삼는 저 사악한 인간들은 미덕과 이른바 진짜 좋은 것들을 영원히 멸시하면서도, 오직 세상에 아무런 쓸모없는 대지의 무거운 짐(pondus inutile terræ)으로 살아가며 가짜 좋은 것들—겉보기엔 가짜라 불리지만 실제로는 이름만 가짜일 뿐인 세속적 쾌락—을 만끽하며 홀로 만족스럽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이로부터 나는 부자나 거지, 부지자나 학자, 동물이나 인간을 막론하고(동물을 감정이 없는 기계로 취급하던 미련한 시대는 이미 지나갔으므로) 각자가 저마다의 행복의 몫을 누린다고 결론짓는다. 따라서 모든 개별 유기체는 자신이 지닌 생리적 조건 안에서 도달 가능한 최선의 건강, 유쾌함, 지성, 힘, 용기, 그리고 인류애에 도달하듯, 저마다의 행복의 단계에 필연적으로 도달하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은 젊어서 죽든 늙어서 죽든, 의사들에 둘러싸인 채 특정한 질병으로 죽도록 정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복하거나 불행하도록, 그리고 정확히 특정한 수준만큼만 그렇게 되도록 신체적으로 설계되어(construit) 있는 존재다. 우리는 또한 지금까지 논한 바를 통해 부유한 자들, 감각의 쾌락, 사회, 미덕, 그리고 법률을 대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프랑스인 최초로 감히 독자적인 사유를 시도했던 몽테뉴는 법이 정의롭다고 믿기 때문에 복종하는 자는 정당하게 법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법은 오직 '법이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역사에 수없이 등장하는 저 불의하고 잔혹한 법들을 따를 이유가 없었을 것이며, 로마 원로원의 불합리한 법령에 맞서 수백 번은 족히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법과 진리, 그리고 정의는 모두 동일한 가치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정치의 손에서 태어난 것이요, 다른 것들은 인간의 감정(sentiment)이 낳은 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가 진리라 부르는 것 혹은 정의로워 보이는 것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법률들이 언제나 존재해 왔고, 지금도 존재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면, 이토록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누구의 손을 들어주어야 하겠는가? 진리란 모든 올바른 신념이 그러하듯 (이것이 내 철학이자 자연의 철학이 도달한 생각이다) 화형대의 불길 앞에서도 꼿꼿이 버텨내야 마당하지만, 오직 관념의 영역에서만 그러해야 한다. 가장 불의한 법일지라도 현실의 물리적 권력(force)을 손에 쥐고 있다면, 오직 미치광이만이 감히 그 법에 정면으로 맞서 결투를 신청할 것이다. 모든 인위적인 법률보다 먼저 제정된 '자연법'은, 우리에게 진리를 법률의 손에 넘겨줄지언정 우리의 신체(corps)를 파멸에 내주지는 말라고 엄숙히 명령한다. 미덕을 대하는 태도 역시 진리를 대할 때와 정확히 같아야 한다. 그것들은 오직 그것을 소유한 주체에게 유익을 가져다줄 때에만 가치를 지니는 존재들이다. 당신이 스스로를 희생해가며 인간들을 계몽하고 사회에 봉사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교육이 낳은 결과물일 뿐이다. 그 씨앗은 인간의 '자애심(amour-propre, 자기애)' 속에 심어져 있는 것이지, 날것의 자연(nature) 속에 내재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특정한 미덕이나 진리가 결여된다면 학문과 사회가 고통을 받지 않겠는가? 설령 그렇다 치자. 그러나 내가 사회를 위해 나 자신의 이익을 희생한다면, 고통을 받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자연과 이성이 내게 행복해지라고 명령할 때, 그것은 타인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해서인가? 극작가 오트로(Auterau)는 그의 작품 《미치광이 취급을 받은 데모크리토스》에서 참된 철학자답게 이렇게 응답했다. "인간은 타인을 위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원칙을 전제한다면, 대가를 거의 치르지 않고도 얼마나 수많은 방식으로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는가! 이 위대한 단순함 속에서 빛나는 자연의 웅장함을 찬탄하지 않을 자 누구이겠는가? 마치 모든 정맥이 결국 단 하나의 길을 통해 피를 심장으로 실어 나르듯, 무한하게 변형되는 기쁨과 고통 역시 오직 '감각(sentiment)'이라는 단 하나의 통로를 통해 영혼에 도달한다. 이 감각을 형성하기 위해, 인간의 모든 신경은 뇌의 특정한 영역(감각 중추)이라는 약속 장소에 한데 모여 훌륭하게 결합해 있다. 또한 다양한 원인에 의해 심장에 피와 생리적 정기(esprits)가 격렬하게 몰려들 때 심장이 더욱 자주, 혹은 더욱 강력하게 수축하듯, 우리의 안녕 혹은 불행에 대한 감각 역시 우리의 감각 기관에 내부적 혹은 외부적으로 작용하는 원인들에 의해 날카롭게 자극받고 깨어난다. 따라서 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의 신경계가 가장 유쾌하고 호의적으로 자극받는 자가 필연적으로(nécessairement) 가장 행복한 인간이다. 이것이 바로 행복의 모든 가지가 뻗어 나오는 거대한 줄기이자, 생명의 나무가 자아내는 매혹적인 울창함이다. 그 나무 그늘 아래 서 있을 때, 설령 우리가 처한 가련한 조건 때문에 때때로 슬픔이 우리의 눈을 너무나 선명하게 멀게 만들지라도, 그 슬픔을 인내심을 가지고 묵묵히 버텨내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참으로 어리석은 인간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도달하고자 했던 궁극적인 목적지다. 논의의 장은 광활했으며 그 여정은 찬란했다. 우리가 기존 철학자들과 젠체하는 지식인들이 닦아놓은 고리타분한 가도에서 과감히 벗어났던 것만큼, 이 여정을 훌륭하고 독창적으로 채워냈기를 바란다. 이제 내가 텍스트를 제공한 저자(세네카)에 대해,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 훨씬 더 구체적으로 논하는 일만 남았다. 내가 이번에 새로이 선보이는 세네카의 《행복한 삶에 관하여》는 지극히 명성이 자자한 저작이다. 주제의 숭고함, 작가의 드높은 평판, 수많은 사상가들이 이 책에 대해 남긴 평론들, 그리고 무엇보다 데카르트가 저 유명한 팔라틴의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 책을 다루었다는 사실까지, 이 모든 요소가 나로 하여금 세네카와 그의 작품에 깊은 관심을 두게 만들었다. 나는 이 책이 기존의 방식보다 훨씬 더 정밀하게 검토되어야 하며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반박되어야 마땅하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데카르트가 무엇이라 평했든 간에 기존의 번역본들을 완전히 도외시하고 내 손으로 직접 새로이 번역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이 텍스트가 우리에게 전해지는 과정에서 발생한 온갖 결함과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안에서 거대한 예술적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세네카가 자신의 주제를 충분히 명밀하고 정확하게 다루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유기적으로 잘 연결되고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거대한 사상적 체계(système)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작가들에게는 한층 흔해진 고도의 조직적 지성과 글쓰기의 기술, 일관되게 전개되는 사유의 보폭, 그리고 깊이 있고 통찰력 넘치는 참된 철학적 천재성이 필수적이다. 반면 세네카의 천재성은 오직 그를 전적으로 지배했던 풍요로운 '상상력' 속에만 존재하는 듯하다. 그는 잔뜩 멋을 부린 인위적인 문체의 소유자이며, 화려한 신조어(néologisme)의 역사는 사실상 그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독하게 계산된 논증을 펼치고 기껏해야 화려한 말장난의 장식품(colifichets)을 그려내는 데 치중하는 그의 문체는, 너무나 인위적인 냄새를 풍긴다. 나는 그가 뿜어내는 저 번쩍이는 지혜의 불빛들을, 폭죽이 공중에 터지면서 잠시 남기고 사라지는 덧없는 불꽃더미에 비유하고 싶다. 간결함을 기하려 할 때마다 그의 문체는 도리어 난해하고 어두워지며, 철학적인 깨달음의 빛줄기보다는 사방을 분간하기 힘든 자욱한 어둠으로 단절되어 있다. 사상의 일관성과 견고함이 결여되어 있기에 논리적 일관성 역시 떨어지며, 겉으로는 웅변을 경멸하는 척하면서도 오직 자신만의 기괴한 방식으로만 유창하다. 미덕을 과시함으로써 정력적이고, 학파의 교조 덕분에 도덕적이며, 가끔 충동적으로만 내용의 강렬함을 보여줄 뿐이다. 정감 어린 가식으로 가득한 지적 부림을 떨며, 타인에게 의미를 전달하거나 심지어 자기 자신을 명확히 이해하기보다 오직 자신의 언어를 화려하게 치장하는 데만 골몰한다. 나는 그가 문장의 화려함과 대구법에만 만족한 채, 정교하게 변주된 용어들을 무의미하게 반복하는 쪽을 더 선호했음을 인정한다. 이는 지성의 유치함과 유희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며, 문장의 아름다움과 언어의 허영만을 좇느라 아무런 장식 없이도 그 자체로 완벽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보다 웅변이라는 가식적인 화장(fard)을 선호하는 자들이 반드시 빠질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함정이다. 사상적 깊이가 얕은 지식인들은 이 번쩍이는 가짜 금박 장식에 언제나 매료당하기 마련이어서, 그저 보기 좋게 배열된 다른 단어들의 화려한 직조물을 바라보며 그것이 마치 완전히 새로운 사상이라도 되는 양 눈이 멀어버리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세네카가 키케로보다는 훨씬 더 강력한 힘(force)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키케로가 이론적인 측면에서 더 훌륭한 철학자였을지 몰라도, 세네카는 실천적인 면에서 훨씬 더 참된 철학자였다. 그는 덜 망설였고, 비록 논리적 일관성은 떨어졌을지언정 확고하고 두려움 없는 걸음으로 죽음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는 페트로니우스처럼 유쾌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지극히 영광스러운 최후를 맞이했으며, 요컨대 키케로라면 평생 부러워만 했을 뿐 감히 따라 하지 못했을 위대한 죽음을 몸소 보여주었다. 비록 지나치게 광신적인 면모가 있었을지언정, 용기와 미덕에 있어서 그의 영혼은 키케로와는 완전히 다른 강력한 담금질을 거친 영혼이었다. 저 로마의 집정관(키케로)이 지닌 우수함이란 고작 웅변술과 지식, 그리고 허영심이 전부였다. 몽테뉴 역시 자신이 찬탄해 마당지 않는 웅변가 키케로에게서, 인간으로서의 품격은 무척 낮게 평가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세네카를 비판하고 때로는 준엄하게 꾸짖을지언정, 가끔은 그를 우러러보고 언제나 존중하도록 하자. 평범하고 비루한 영혼은 결코 도를 넘지 않으며, 결코 위로 솟구치지 못한 채 그저 물 중간에 어정쩡하게 떠서 헤엄칠 뿐이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헛된 노력일지라도 그것이 미덕을 지향한다면 기꺼이 칭찬해 주고, 우리 연극 무대 위에서 흔히 보듯 미덕을 고무하기 위한 과장과 허풍쯤은 너그럽게 용서해 주자. 파스칼이 필사적으로 믿음을 갈구했듯, 세네카는 필사적으로 덕스러워지기 위해 투쟁했다. 악덕의렁텅이 한가운데서 미덕의 최정상으로 기어 올라가는 것은 지독하게 어려운 일이다. 어떤 이는 독수리의 용기를 지녔고 어떤 이는 독수리의 비행 능력을 지녔지만, 그 정상을 꿰뚫어 보는 독수리의 눈을 가진 자는 극히 드물다. 새가 날개에 의지해 날아가듯, 인간은 자신의 타고난 천재성에 이끌려 나아갈 뿐이다. 하지만 세네카 스스로가 넌지시 말했듯, 그가 온 힘을 다해 자신을 채찍질하고, 자극하며,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비천한 삶을 면하려 노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는 자연적 조건을 갖춘 것에서 더 나아가, 세네카의 미덕과 용기가 그러하듯 자신의 행복을 타인에게 널리 전파하고 소통시키는 능력(communicatif)까지 지닌 자는 참으로 백번 축복받아 마땅한 인간이다. 이상이 행복에 관한 나의 철학적 견해들이며, 내게 이 생각들을 글로 정립하고 싶은 열망을 불어넣어 준 저 위대한 저자(세네카)에 대한 나의 솔직한 평론이다. 수많은 이들이 나의 이러한 사유 방식, 특히 미덕과 양심의 가책을 다루는 나의 태도에 깊은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나의 주장이 때로는 너무나 새롭고 대담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상을 정립하기 위해 홉스나 샤프츠버리 경(Mylord S…) 같은 이들의 저작을 단 한 번도 들추어보지 않았으며, 오직 거대한 '자연(nature)'으로부터 모든 것을 스스로 길어 올렸다. 그러나 선례의 노예이자 미신의 노예로 살아가는 자들, 진리가 눈앞에 나타나도 그것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저 지적으로 왜소한 인간들은 이 장엄한 진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우리가 평온한 항구 안에서 성난 파도의 분노를 비웃듯, 이곳에서는 온갖 세속적 편견과 철학의 적들을 완벽하게 무시하고 비웃어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토록 철학자들에게 아름다운 초대가 또 어디 있겠는가! 실제로 나는 나를 위협하던 저 고리타분한 자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이제 아주 멀리서만, 마치 내가 기적적으로 탈출해 나온 난파선에 몰아치는 저 먼바다의 폭풍우 소리처럼 희미하게 들을 뿐이다. 이곳에서는,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철학자에게 이 얼마나 거대한 축복인가! 누구나 자신의 취향에 따라 철학을 연구하고, 과학을 탐구하며, 아름다운 예술을 마음껏 가꾸어 나갈 수 있다. 왜냐하면 유년 시절부터 이 학문의 영역에서 스스로 찬란하게 빛났던 위대한 군주께서 친히 이 가도를 활짝 열어주셨기 때문이다! 소플리니우스가 전혀 다른 주제를 다루며 읊조렸듯, 그분은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Dux)이시며, 완벽한 모범(exemplum)이시자, 시대의 필연(necessitas) 이시다. 우리의 이 존엄한 평온을 방해하려 드는 저 알량하고 신성 모독적인 방해꾼들은, 이 행복한 기후가 지배하는 영토 안에서는 감히 소란을 피우지 못한다. 우리는 마땅히 목소리를 높일 수 있고, 신이 주신 이성을 완벽하게 휘두를 수 있으며, 인간에게 부여된 가장 아름다운 특권인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온전히 향해 누릴 수 있다. 신학자들이 철학자들을 심판하려 들다니, 이 얼마나 가련하고 가당치 않은 비극인가! 그것은 암흑 같은 미신과 야만의 시대로 사회를 되돌리려는 짓과 다름없다. 반대로 저 오만방자한 짐승들의 주둥이에 단단히 재갈을 물리고 그들에게 아주 미미한 권력만을 남겨두는 것(그들은 이미 너무나 많은 권력을 찬탈해 갔으므로)이야말로, 문학의 진보를 촉진하고 국가를 찬란하게 번영시키는 유일한 지름길이다. 무지(ignorance)란 언제나 국가를 비하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종국에는 국가를 완전히 파멸시키는 법이다. 아! 만약 내가 북방의 솔로몬(프리드리히 2세)이 지닌 저 위대한 미덕들을 찬양하는 일에 있어서, 그분을 우러러보는 것만큼이나 그분의 발자취를 뒤따르는 것이 조금이라도 수월했더라면 나의 깊은 감사함과 열정은 참으로 커다란 기쁨 속에서 발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미천한 역량을 너무 과신하는 일일 터다. 세상의 거의 모든 군주가 행복이란 그저 쾌락의 품 안에 부드럽게 쓰러져 잠드는 것에 불과하다고 믿을 때, 오직 가장 깨어있는 인류애와 완벽한 영웅주의에서 비롯되는 행복만을 유일한 기쁨으로 여기는 위대한 군주의 영광에 감히 그 누가 무엇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 자신의 학문 탐구에 군대를 통솔할 때와 똑같은 엄격한 기율을 도입하는 군주, 그 지성이 군대가 뿜어내는 불꽃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그들의 무기보다 훨씬 더 찬란하며, 영토를 정복하고 승리를 거두는 저 위대한 왕의 영광에 말이다! 요컨대 지혜와 서광으로 가득 차 계시어,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오직 자기 자신의 힘(천재성)만을 의지해 immortality(불멸)를 향해 힘차게 날아오른 군주에게 말이다. 그러므로 군주와 그 왕국의 지식인들에게 이보다 더 영예로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모두가 누리는 이 찬란한 지적 자유가, 다른 나라의 지식인들이 권력자들의 은혜나 음모, 비열함, 그리고 저 위선적인 종교인들과 아첨하는 여인들 및 궁정 신하들이 부리는 온갖 천박한 수작에 빚지고 있는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오직 철학자 왕의 강력한 천재성 덕분이라는 사실을 내 온몸으로 깊이 느끼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이미 충분하다. 모든 예술과 학문이 한데 어우러져 그분의 지식을 이루니, 키케로와 필적하는 그 웅변은 찬란하게 빛나네. 자연이 숨겨둔 거대한 심연을 홀로 깊이 탐사하시고, 위선적인 종교 사기꾼들의 기만적인 오류들을 완벽하게 깨부수셨네. 보라, 정무의 피로 속에서도 지칠 줄 모르는 저 박식한 군주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저 고결한 예술 속에서 무지한 자들을 압도하시네. 그분은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을 행하시고, 거대한 보폭으로 질주하시네, 파르나소스의 학문에서 올림포스의 신성으로, 유희의 정원에서 전장의 포화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