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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인생에 대하여

8월 말까지 하나 작성합니다.

사회적으로 쓰레기. 즉 잉여 인간 및 존재의 필요성이 없는 인간이 늘어나는 까닭. 과거에는 한명 더 부려 먹으려 했다면, 이젠 단지 환경오염의 주범일 뿐이다. 세계와 사회, 국가의 발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존재들이다.

  1. 순수한 인식 주관, 관념에 근거해서 판단하는 습관, 성향, 사상, 환경으로 인하여 쓰레기 인생이 된다. + 소비주체이면 더 심하다.

  2. 그러한 것은 고도 문명 사회에서 일어나며, 개인주의 및 도시화, 고립, 분업과 소외, 자기중심적 사고, 인간을 물리, 화학적으로 환원하는 사고, 지나친 방치 혹은 과잉보호적 교육, 부모의 이기심에 근거한 교육의 거짓 됨, 도덕과 종교의 무너짐, 겸손 혹은 객관적이지 못한 나약함, 등등 다양한 이유에서 비롯된다.

해결법1: 시공간 밖에 있는 순수한 자아, 나, 자기란 관념, 개념을 버리고 시공간 안의 나 관념을 사용해야 한다.

해결법2: 나 관념(존재론)을 세우면 다음엔 생각과 행동(실천)이 있다. 생각의 원리(인식론)와 윤리(도덕이론)을 탐구해야 한다.

한계: 사회적 쓰레기 인생을 피한다고 그 개인이 행복하진 않다.

나중엔 좀 더 근본적인 해결 방안을 적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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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서양철학사

그런데 고대 그리스에는 우리가 이해한 의미로 종교라고 여길만한 사례가 더 있었다. 올림포스의 신들이 아니라 디오니소스나(로마어: 바쿠스)와 관련된 종교다.
우리는 대부분 디오니소스를 다소 불명예스러운 주신 [洒神] 이자 만취의 신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주신 숭배로부터 후대 여러 철학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심오한 신비주의[神秘主義, mysticism]가 발생하고, 그리스도교 신학의 형성에도 한몫을 하게 되는 도정은 충분히 주목할만하다.
그리스 사상의 발전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경로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디오니소스 바꿔 말하면 바쿠스는 원래 트라키아족의 신이었다.
그리스인은 문명이 훨씬 뒤떨어진 트라카아인을 야만인으로 여겼다.
초기 농민이 모두 그렇듯 트라키아인도 풍요제를 올렸으며 풍작을 촉진하는 신을 섬겼다.
그들이 섬긴 신의 이름이 바로 바쿠스였다.
바쿠스가 인간과 닮았는지 황소와 닮았는지 분명 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트라키아인은 맥주 만드는 법을 발견했을 때 술에취한 상태를 신성하게 여기고 영예를 바쿠스에게 돌렸다.
나중에 그들이 포도나무를 재배 하게 되면서 포도주를 마시는데 익숙해지자 바쿠스를 더욱 숭배했다.
일반적으로 포도와 포도주가 빚어내는 신성한 광기를 연결한 바쿠스의 기능은 중요해지고, 풍요를 촉진하는 바쿠스의 기능은 다소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다.

바쿠스 숭배의식이 트라키아(Thracia)에서 그리스로 넘어간 연대는 분명치 않지만, 역사시대 직전이었던 듯하다.
바쿠스 숭배 의식은 전통종교의 적대감에 부딪혔는데도 확고한 종교의 지위를 확보했다. 바쿠스 숭배 의식은 야생동물을 갈기갈기 찢고 전부 날로 먹는 야만적 요소를 포함했다.
또한 기묘해 보이는 여성주의적 요소도 들어 있었다.
신분이 높은 여자들과 하녀들이 훤히 보이는 언덕에서 무리를 지어 황홀경에 이르려고 밤새껏 춤을 추었는데, 아마 일부는 술에 취했겠지만 주로 신비감에 도취 되있을터다.
남편들은 못마땅 했으나, 아무도 종교행사에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
바쿠스 숭배 의식의 아름다움과 야수성은 에우리피데스의 『바쿠스의 무녀들』에서 드러난다.

디오니소스(바쿠스) 숭배가 그리스에서 성행한 현상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문명이 급속히 발전한 여느 사회와 마찬가지로 그리스인, 적어도 특정 부류 그리스인은 원시성을 갈망하고, 당대의 도덕이 허용하는 수준 이상으로 본능에 충실한 더욱 정열적 삶의 방식을 동경했다.
강압에 의해 감정보다 행동이 훨씬 개화된 남녀에게 합리성[合理性, rationality]은 지루하기 짝이 없고, 덕[忠 ,virtue] 이란 부담스러운 예속으로 느껴지길 따름이다.
그래서 사상, 감정, 행동 모든 면에서 반동이 일어난다.
사상 측면에 나타난 반동이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지만, 우선 감정과 행동의 측면에서 일어난 반동에 주목해 보자.

동물과 야만인은 다가올 겨울의 식량을 모으기 위해 봄에 일하지 않으며, 벌이 꿀을 만든다거나 다람쥐가 호두를 땅에 묻는 따위로 드물게 나타나는 행동도 순전히 본능에 따른 행동일 뿐이다.
이러한 행동은 문명인에게 나타나는 예상의 결과가 아니라 직접적 충동이 행동으로 드러난 결과이며, 나중에 이를 관찰한 인간이 유용하다고 설명한데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의 예상은, 충동과 아무 상관없이 이성이 장래의 어느 날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동하는 경우에만 일어난다.
사냥은 현재의 쾌락을 즐기려는 것이므로 예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경작은 노동이며, 자연적 충동에 따라서는 경작을 할 수 없다.

문명사회는 자기관리에 의한 견제 수단인 사려나 예상뿐만 아니라 법과 관습, 종교를 통해 충동을 억제한다.
이로써 문명사회는 야만상태에서 물려받은 충동을 억제하고 본능이 점점 덜 드러나게 하면서 더욱 체계적으로 관리한다.
어떤 행동은 범죄로 분류해 처벌하고, 법에 의해 처벌할 수 없는 다른 행동은 사악한 행위로 분류해 사회의 승인을 받을 수 없도록 처리한다.
사유재산 제도는 여성을 예속 시기며 노예 계급을 만들어낸다.
한편으로 사회의 공동 목적이 개인에게 강요되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인생을 전체 사회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습관을 몸에 익힌 개인이 점점 자신의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러한 과정은 수전노의 경우처럼 지나치게 멀리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극단에 치우치지 않더라도, 사려하면 인생에서 맛보아야 할 최선의 요소들 가운데 일부를 쉽게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디오니소스 숭배자는 사려에 맞선 반동세력으로 등장한다.
그는 육체와 정신이 도취 상태에 들어가 사려 탓으로 훼손된 강렬한 감정을 회복한다. 그가 기쁨과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세계를 알아보자마자, 상상력은 일상의 걱정이나 근심이라는 감옥에서 갑자기 해방되면서 자유로워진다.
바쿠스 종교의식은, 종교적 열광(enthusiasm)을 불러일으키는데 어원을 따져 보면 신이 숭배하는 사람 속으로 들어온다는 의미다.
이를 통해서 신의 숭배자는 자신이 신과 하나가 되었다고 믿게 된다.
인간이 성취한 가장 위대한 업적에는 도취(intoxication)의 요소, 바로 사려를 단번에 날려버리는 정념(passion)의 요소가 어느 정도들이 있다.
바쿠스 신과 관련된 요소가 없다면 인생에는 아무 재미도 없겠지만, 바쿠스의 요소가 들어오면서 우리의 인생은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사려와 정념의 대립이 빚어낸 갈등의 역사는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는데, 우리가 완전히 어느 한편에 사기를 강요하는 갈등이 아니다.

『러셀 서양철학사─을유문화사』



'계몽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답변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잘못하여 처하게 된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숙이란 자신의 지성을 다른 이의 지도 없이 사용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미성숙의 원인이 지성의 부족함에 있지 않고 결심의 부족에, 또 자신의 결심을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 사용할 용기의 부족에 있으면, 그 미성숙은 스스로 잘못하여 처하게 된 것이다.'감히 생각하라!''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계몽의 모토다.

출처: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실천적 행위에 내재한 근본적인 갈등구조

칸트의 실천철학에 따른다면

내적 갈등의 원인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처럼 인간 의지의 자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의지의 불완전성에 있다.

인간 의지는 ‘순전히 이성이 가리키는 근거’에 의해서만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감성적 동인에 영향을 받아 찾아진 근거’에 의해 마음을 정할 수 있는 만큼 불완전하며,

이 불완전성은 의지가 정해짐으로써 행해질 수 있는 인간의 모든 실천적 행위에 근본적인 갈등구조로서 내재해 있는 것이다.

이 두 종류의 의지규정근거들은 타당성에 있어서 서로 다르며,

또한 그들의 다름은 그저 서로 구별되어 나란히 공존하는 다름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대립하는 다름이다.

다만 일상생활에서 대개의 경우 서로 다른 두 종류의 근거가 동일한 행위의 필연성을 가리키기에 이 필연적인 대립은 잘 의식되고 있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서로 다른 행위들의 필연성을 가리키게 된다면,

행위자는 그것들의 대립을 의식하게 되어 그 둘 가운데 어떤 것에 의해 자신의 마음을 정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게 되는 상태,

즉 갈등상태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칸트의 실천철학이 제시할 수 있는 갈등 해소의 길은 대립되는 것들의 조화로운 화합은 아니다.

우리 인간으로서는 갈등의 근본구조를 이루는 두 종류의 의지규정근거들의 대립이 서로 조화롭게 화합될 수 있다는 것을 결코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갈등 해소의 길은 두 종류의 근거 가운데 어느 하나에 의해 마음을 정하는 것뿐이며, 그 근거는 다름 아닌 ‘순전히 이성이 가리키는 근거’일 수밖에 없다.

출처: <실천적 행위에 내재한 근본적인 갈등구조|작성자 nescio>



아들러 심리학의 세 가지 키워드: 열등감, 우월 욕구(인정 욕구), 허영심

열등감은 크건 작건 인간이라면 모두 갖고 있는 것으로서, 인격의 바탕에 근본적으로 깔려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훨씬 오랜 기간 유아기와 유년기를 거치기 때문에 자기와 가장 가까운 주변 사람들, 즉 부모와 가족의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정신행활을 이해하기 위헤서는 아이의 유년 시절에 주목해야 하며, 거기서 부터 의미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아들러의 견해다. 여기서 부모가 아이를 돌보는 일은 본능에서 우러 나온 행동이기도 하지만 부모의 공동체 의식이라는 사회적 개념이 전제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후 이 개념은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서 중요한 핵심 개념이 되고 있다.

사회 생활은 아이에게 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인간에게도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 자연 속에서 혼자 존재하는 인간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최소한의 공동체인 가족에서부터 시작해 친척과 마을 사람 등의 주변 환경과 더 나아가 학교, 도시, 국가에 이르기까지 공동체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다. 그 속에서 노동 분업을 통해 각자의 역할을 하며 생업을 이어 가고 서로에게 의존하고 보완하며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한다.

"열등감이 나타나는 바로 그 순간에 그의 정신적 삶의 과정이 시작된다"고 했듯이 인간은 모든 종유의 열등감에 매우 민감하다. 아이는 오랜 유년기 동안 자신의 신체적 열등함을 절감하며 주위 어른들의 보살핌에 의존하게 된다. 아이의 신체적·정신적 무력감과 연약함으로부터 사회적 공동생활에 대한 의존성이 생기고, 자신의 연약함을 보상하려는 욕구는 아이에게 자신만의 재능과 능력을 발전시켜 대항해 보고자 하는 맹렬한 자극이 된다. 아이의 정신 속에 깊이 뿌리 내린 열등감은 아이의 영혼을 지배하는 근본 기질이 된다. 그래서 결코 충족시킬 수 없는 야망으로 점점 변질되어 그를 흔들어 놓는다.

모든 생존 과정에서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아이는 부모의 관심이 자기에게 쏠려야만 자신에게 훨씬 더 유리한 환경이 조성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며, 그로부터 애정 욕구와 인정 욕구가 싹트게 된다. 애정 욕구는 그 이후의 삶에서 사랑과 결혼, 사람들과의 교제에 대한 욕구로 발전한다. 한편 신체적인 조건에서 어떤 결함을 안고 있다거나 외적 조건에서 발달이 뒤진 아이들, 경제적인 어려움을 가진 아이들, 부모의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거나 과잉 보살핌으로 이기적인 성격을 발달시킨 아이들은 정상적인 조건의 아이들에 비해 왜곡된 세계상을 발전시키면서 모든 관심을 자신의 열등감을 보상할 수 있는 방향으로만 집중시키게 된다.

이렇게 유아기 때부터 시작된 열등감은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그에 대한 보상 심리로 우월감에 대한 욕구를 불러 일으킨다. 그것들은 사소한 형태로는 가족 내에서 부모의 사랑을 놓고 다투는 형제들 간의 경쟁이나 학교에서 벌어지는 점수 경쟁으로 나타나지만, 범위를 넓혀 보면 인간 삶의 크고 작은 모든 권력 관계 속에 나타난다. 심지어 가장 평등해야 할 친구나 연인 관계, 부부간에도 우위(권력)를 차지하고자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암투가 계속되기 때문에 인간은 따뜻한 동지애를 잃어 버리고 서로에게 높은 담을 둘러치며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마음의 병을 앓게 된다. 그로부터 연유한 갈등과 고통은 좀처럼 극복되지 않으면 대부분의 인간들은 죽을 때까지 그것에서 놓여 나지 못하고 그것과 씨름 하게된다.

우월 욕구(권력 욕구)가 크면 클수록 개인의 삶은 온갖 종류의 투쟁 관계 속에 놓이며, 그것에 집중하는 사이 주변과의 관련성과 친밀성을 점점 잃어 버리게 된다. 실현될 수 없는 높은 야망에 시달리는 사람일수록 인생의 문제를 직면해서 올바르게 해결하지 못하고 점점 멀어지며 혼자만의 세계에 틀어 박히거나 공상 속에서만 우월감을 맛보기 때문에 신경증적 증상으로 발전해간다. 그들의 노력은 거의 대부분 무익하고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리며 참다운 자기 인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삶에서 필수불가결한 사회적 감정이 제대로 성숙하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공동체 의식이 결여된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우월감의 만족만 추구하기 때문에 인생의 여러 문제에서 도피하며, 주변 사람들과의 협력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에서도 자신의 노력을 투입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노력을 착취하고 자신만의 이익을 좇으려는 경향을 나타낸다.

열등감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하면 개인에게나 사회, 인류의 이익에 공헌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과도한 열등감에 짓눌려 주변 사람들에게서 받은 피드백을 잘못 인식하고 해석함으로서 더욱 그릇된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런 노력 속에서 그의 모든 행위는 우월감을 향한 질주와 다름없게 된다. 그 우월감은 그에게 최종 목표인 것이며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그의 은밀한 존재 이유가 된다. 열등감이 클수록 그에 비례해서 권력과 우월감을 향한 그의 노력은 과장되고 극렬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과도하게 커져 버린 우월성의 추구가 여러 번의 실패를 경험하면 자아는 위축감을 느끼게 되고 고립적 행동으로 발전하거나 자기기만 또는 자아도취 방향으로 왜곡되어 발전한다. 그것은 일반 사람들의 건강한 인식과 맞지 않는 것이며, 과도해지면 신경증적인 증상으로 변화된다. 그렇게 그는 주변 환경과 불화하게 된다. 그들의 삶에 대한 태도는 투쟁적이 되며 평생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거나 한 사람과의 관계에만 집중하는 성격을 발달 시키게 된다. 인생의 모든 고비에서 만나는 각종 어려움을 자신에게만 불리한 어떤 형벌이나 불운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과제 수행에 필요한 적절한 관심과 노력을 회피하게 되며, 그것을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몰아 대거나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그로부터 빠져나갈 방법만 찾기 때무에 인생에서 실패할 위험이 높아진다. 그러나 그런 실패 또한 자신의 잘못으로 인식하지 않고 잘못된 방법과 수단으로 그것을 보상하려고 하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자기 자신에게도 치명적인 결과만 초래하게 된다.

사람들은 사회활동 속에서 자기평가를 하게 되며 그것은 끊임없는 우월성에 대한 욕망과 경쟁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연결된다. 이 욕망들은 저절로 정신적 긴장을 아기하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불안 정감과 열등감의 강도는 아이가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느끼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판이하게 다르다. 그것은 또 열등감에 대한 조정, 보상 행위로 몰아가며 그에 따라 목표도 다시 설정된다. 정상적인 방법을 통한 목표 추구가 좌절되면 단순한 보상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과잉행동으로 보상 받으려 한다. 그들은 엄청나게 조급해하며 훨씬 과도한 우월감을 추구하는데, 그것들은 대부분 허영심, 교만, 정복욕의 형태로 나타나며 그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에도 유해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는 동안 그는 기만과 허위 속에서 살아가며 인생에서 어떤 기쁨도 경험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의 삶은 온통 승리에 대한 욕구로 가득 차며 온갖 종류의 승리감에 대한 환상으로 넘쳐난다. 그의 관심은 자기가 남에게 어떻게 보이고 평가받는지에 대해서만 집중한다. 그 사이에 삶과의 진정한 연관성이나 주변 사람과의 연관성을 잃어버리고, 현실 세계와의 접촉점을 잃게 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실질적인 의미나 가치가 아니라 외형적인 것,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자기가 어떤 평가를 받느냐 하는 것뿐이다. 허영심은 그를 무가치한 일과 노력에 몰아넣게 만든다. 아이들의 경우에는 그것이 다른 인간이나 생명이 있는 존재와의 감정이입을 억제하고 방해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고통을 즐기는 놀이나 동물 학대형대로 발산되기도 한다. 어른들의 경우에도 다른 사람과의 진정한 교류와 인간애를 방해해 진실한 친구를 갖는다는 일이 영원히 요원해져 버린다. 그의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실패를 보며 즐거워하는 사덴 프로이데의 감정이 자라나며, 밖에 있는 관찰자에게 그런 감정을 들키기도 한다.

허영심에 가득 차있는 사람들은 잘못된 일에 대해서도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항상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전가한다. 그들은 오히려 남들의 잘못을 보며 행복해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자기들은 항상 옳고 남들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의 있지도 않은 부당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그들은 어떤 노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때때로 자신의 정당성 이 부정되는 상황에서는 교묘하고 인위적인 기교를 부림으로써 자기 스스로 흑은 다른 사람들이 일시적으로라도 그의 정당 성을 믿게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자신의 허영심이 상처받지 않고 보존될 수 있으며 우월감이 그를 지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실제 모습보다 훨씬 더 능력 있고 우아하고 고상한 존재로 자신을 포장하고, 항상 그렇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안고 살아가기 때문에 현실 생활에서 더 큰 갈등관계 속에 빠져들며 삶에서 부적응을 초래하게 된다. 또 주위의 모든 사람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싶다는 동경이 너무 가릴 해수 단과 방법의 종류를 가리지 않기 때 문에 주변 사람들과 마찰을 일으킨다. 즉, 공동체와의 충돌과 모순을 피할 수 없다.

극도의 허영심에 사로잡혀있는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충일감이 결여되어 있을수록 더욱 큰 목표를 세우게 된다. 어떤 사람이 과장된|행동을 보인다든지 지나친 허영심을 드러내고 있을 때, 예를 들어 언제나 어디서나 자신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 고 있다고 생각하며 오직 그것만을 자신의 행위의 목표와 기준으로 삼을 때 그 사람의 자기평가는 매우 낮을 것이라고 추측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 평가하기 때문에 마음의 안식을 얻기가 힘들고 그에 대한 경쟁심 리로 남들에 대해 적대적 성향을 품게 된다. 그래서 아주 날카롭고 비판적인 어투로 자신의 적대감을 표출한다. 모든 것을 조 롱과 비방 거리로 삼고 혼자만 옳다고 하며 상대의 모든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가치를 어 트림으로 씨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하러는 것이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자신에게 모욕으로 느껴질 정 돌며 완벽한 상황에서조차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그에게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진다. 그런 행동으로부터 우리는 그 사람의 내면의 허약성을 추측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열등감으로부터 우월욕구 (인정욕구와 권력욕구)가 생겨나며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피할수 없는 운명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가면 개인에게나 사회, 인류에게 이익이 될 수 있지만(실제로 수많은 천재 이 찬란한 업적들은 그들의 열등감 극복의 소산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우월 욕구가 없었더라면 그런 결과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잘못 발달한 우월 욕구는 모든 이들에게 참담한 결과로 되돌아온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사회 부적응자나 신경증 환자, 아니면 사회적 일탈자의 삶이라는 결과를 초래하며,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영혼이 심각하게 병든 우울한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또한 우월 욕구가 겉으로 과도하게 드러나는 형태를 허영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허영심은 만족 시 기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으로서 눈덩이처럼 자꾸 불어나기 때문에 허영심이 심한 사람의 삶은 영원한 목마름에 허덕이는 가련한 형태가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우리가 흔히 보는 막장드라마의 주인공에 비유될 수 있다. 그들은 대개 모든 것이 파국으로 끝난 뒤 자신이 추구하던 삶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 절망과 고통 속에서 깨닫는다. 아들러는 사실 인간적 삶에서 열등감과 우월 욕구를 고 통의 근원으로, 허영심을 만 악의 근원으로 간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의 열등감을 이해하고 나면 아이를 교육하는 행동규칙을 알 수 있게 된다. 아이의 삶을 힘들게 만들지 말고 삶의 비 참한 면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보호하고, 가능한 한 삶의 밝은 면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라고 아들러는 역설했다. 그가'아이'와'교육'에 보낸 관심은 어느 심리학자보다 월등해, 빈에서 그가 왜 그렇게 많은 아동 병원을 운영했는지에 대한 대답이 되고 있다. 아들러는 이 책의 후반부에서 다시'교육'에 방점을 찍고 있다.

아들러는 가정이 아이의 교육을 담당하는 최선의 제도임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부모가 필요한 통찰력을 갖고 아이의 정신 발달을 올바른 방향으로 세심하게 이끌어주기만 한다면 인간 종족의 생존과 존속을 위해서, 또한 사회의 훌륭한 일원을 기워내는 교육의 기능에서 가정보다 더 적절한 기관이 없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재 문화 속에서 가정은 가족이기주의의 그릇된 관념에 지배되어 아이의 목표를 엉뚱한 방향으로 비 틀어버림으로써 아이들이 잘못된 권력 개념과 지배욕, 우월 욕구를 키우도록 조장하고 있다. 적절하게 훈련받아야 할 공동 제의식의 교육은 배제되고 이기심과 허영심으로 무장된 아이들만을 길러냄으로써 아이의 인생과 사회, 더 나아가 인류의 안녕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오류를 개선하고 가정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곳이 아들러는 바로 '학교'라고 최종 결론을 내린다. 현재 상황에서 그보다 더 나은 대안이 없고 이제까지의 잘못된 관행을 고쳐 제대로 운영된다는 전제하에서, 교사들에게 학생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예민한 감각이 있고, 잘못된 발달을 교정할 수 있게 도와줄 능력과 통찰력이 있다면 학교가 아이 교육의 최적의 장소라고 아들러는 단언하고 있다.

그러나 아들러가 오늘날 교육 현실을 보고 교육에 걸었던 그의 기대가 희망 사항으로 끝나버렸음을 알게 된다면 뭐라고 말할지 궁금해진다.

─<아들러의 인간이해> 홍혜경



용기란 무엇인가?

위험과 공포에 단호하게 직면하는 정신적•도덕적 힘이 용기다. 그러므로 크든 작든 위기를 맞이하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용기이며 용기 없이 위기의 극복은 불가능하다. 물론 용기가 모든 위기를 극복하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용기 없이는 위기에 당당하게 직면하고 대항하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겁과 만용의 중용(中庸)이 용기라고 했고, 이 중용을 아는 더는 사려(思慮)라는 지적인 덕(德)이요 요구된다고 했거니와, 진정한 용기는 우선 이성적이기를 요구한다.합리적인 정세파악은 주체적결단의 기반이되며,용기 는 주체적 결단과 그 실천을 위해 요구된다.

주체적 결단은 용기의 원천이다. 여기서 결단은 행위의 많은 가능성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최후의 결정을 말한다. 이러한 결단에는 물론 사회적인 여러 조건 등, 객관적인 조건이 많은 영향을 미치지만 근원적인 것은 나 자신의 의지에 의한 주체적 선택이다. 가장 참되고 훌륭한 자기를 선택하고 그러한 자기를 통해 가장 참되고 훌륭한 미래를 선택하는 것이 결 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결단을 원천으로 하는 용기는 생명의 물리적 힘 자체일 수도 없고 단순한 반항의 힘도 아니다.

현존재적인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는 것, 따라서 자유로운 결단을 위해서는 죽음도 각오한다는 것, 여기의 진정한 용기가 성립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용기에는 무한한 책임이 따른다.

위대한 용기를 실증한 사람으로서 소크라테스를 드는 더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는 신이 아테네로 보낸 아테네 의 등에이며'걸어 다니는 아테네의 양상이었다. 그가《변명》에서 말한 것처럼, 아테네는 거대하고 기품 있는 군마(軍馬) 같으나 거대하기 때문에 운동이 둔해서 이를 각성 시기는 등에 가 필요하고, 그 등에 가 바로 자기라는 것이다. 그의 이러 한 태도는 일종의 소명의식이었다.

그의 선택은 타락과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아테네를 '세계의 중심'으로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당시 아테네의 지배적인 풍조에 비판적이었다. 아테네를 구제해 야 한다는 그의 사명감은 허위에 대한 비판과 부정에서 출발 한 것이었고 진리를 위해 투쟁하는 참된 용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었다.

그는 신랄한 비판자였다. 그는 아테네의 썩은 현실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 대가는 청년을 타락시키고 폴리스의 제신을 모독했다는 최면 아래서 사형을 받는 것이었다.

그의 용기는 재판 후 그가 태연히 독배를 마신 데에 집약되어 있다. 독배를 마시는 과정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지닌 용기의 두 측면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독배를 마시게 된 원인은 그의 현실 부정에 있었다. 아테네의 윤리적 재건을 염원한 는 소크라테스로서는 목전의 부패한 현실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러한 부정을 통해서만 아테네 시민을 이성과 진리에 눈뜨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용기는'현실을 부정하는 용기셨다 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옥중에서 크리톤이 탈옥을 권유할 때, 그는 설령 악법이라 하더라도 국법에 복종하는 것이 자기의 약속을 지키는 길이라고 하면서 탈옥 권유를 물리친다. 여기서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봉착한 문제상황을 보게 된다.

그는 법정에서 한 변명을 통해 그에 대한 재판이나 판결이 부당한 것임을 명백히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유죄가 인정돼 고사형 언도를 받음으로써, 사실상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부정하려던 현실에 의해 좌절을 당하며,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 있기 때문에 그는 재판 과정에서 신념과 용기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는 부당한 법과 재판관에 의해 부당한 재판을 받은 만큼 탈옥에는 일종의 정당성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그의 탈옥은 그의 철저한 부정 정신으로 보아서는 당연한 귀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탈옥을 거부한 것은 그가 부정하던 뇐 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부당한 판결로 죽음을 강요하는 현실에 복종하겠다는 것은 현실의 부정에서 현실의 긍정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는 불가한 역적인 부당한 권력의 강요로 죽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현실의 부정에서 현실의 긍정으로, 즉 극에서 극으로 옮겨간 그의 태도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현실의 긍정이 결코 그에게는 구원의 길이 아니었고 오히려 죽음의 길이었다는 점이다. 재판 자체까지도 비판하던 소크라테스가, 그만큼 철저한 부정 정신의 소유자이던 소크라테스가 태연히 독배를 마심으로써 그러한 현실에 순응했다는 사실은 용기의 또한 측면, 즉 현실을 긍정하는 용기를 보여준다.

《파이돈》에서도 독하게 진술한, 내세에 있어서의 영생에 대한 신념이 죽음을 태연히 맞이하고 가혹하게 부정하던 현실을 긍정하는 유일한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다른 면에서 그의 현실 긍정의 원천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용기의 두 측면이다. 즉 용기는 한편으로는 현실을 긍정하고, 또 한편으로는 현실을 부정한다. 다시 말하면 용기는 현실의 완전한 부정에서는 탄생할 수 없다. 참으로 용기 있는 자는 현실에서도 피할 수 없다는 의미에 서 일단은 자기가 놓여있는 구체적인 현실을 긍정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용기가 어떤 현실을 부정하려는 비판의식, 자유 의식의 발로 인한, 용기에는 부정할 구체적 현실이 필요하고 이 현장에서 진리를 증언해 아만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경우 현실에 대한 긍정은 현실에 대한 순응이나 수동적인 수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경우, 일차적 선택은 아테네라는'현실에 대한 근원적 금장이었다. 그는 아테네를 멸망 시기거나 아테네에서도 피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아테네를 사랑하고 아테네를 재건하려는 염원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아테네 안에서 미움받는 등에의 역할을 했다. 아테네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테네에 반항한다는 역설이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신것은 그의'근본적인 금장에 철저하려는 용기 였다고 볼 수 있다.현실도피와 현실부정을 동일한 것으로 보려는 착각이 있다. 그러나 현실 부정이 결코 현실도피가 아님을 보여준 것이 소크라테스의 용기다.

앞에서 진정한 용기는 이성적이고 주체적이며 무한한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했거니와, 현실도피에서 이성적•주체적 대 도를 발견할 수는 없다. 현실도피는 결단하는 것이 아니라 결단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도피는 위험이나 공포에 단호하게 직면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힘의 발휘가 아니라 반대로 위험감 또는 공포감의 소산이다. 가능한 한,감정적으로 나마 현실을 없는 것으로 가장하려는 일종의 감정적 반응이 현실도피이며,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비겁의 소산이다. 현실을 없는 것으로 돌려버리러는 대도이기 때문에 대결할 대상이 없다. 투쟁 없이 패배를 자인하는 태도 인 것이다.

현실도피에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부정하거나 극복해야 할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도 피하고 그것이 최대의 현실 부정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을 기만하기 위한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조국의 현실이 역겹다고 해서 조국을 무화(無化) 하려는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대결해야 할 역겨운 현실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므로 현실에서 도피한 자는 행동할 이유도, 장소도, 대상도 없다.

현실 부정은 현실도피와는 분명히 구별된다. 여기서 관념적인 현실 부정과 행동적인 현실 부정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현실 부정은 궁극적으로는 부정행위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관념적인 현실도피는 흔히 현실도피자의 자기합리화에 그친다.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아무리 잘 보아주어도 지적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용기는 행위에 나타나는 것이며 결단은 행위를 통해 구현된다. 따라서 현실에 대한 부정은 반드시 어떠한 형태로든 행위를 요구하고, 따라서 행위의 구체적 대상 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의 과정에서 정신적•도덕적 힘으로써의 용기는 구체화된다.

그러면 여기서 행위의 구체적 대상은 무엇인가? 부정하려고 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현실이다. 현실도피가 현실을 전적으로 긍정 하지 않으려는 태도라면 현실 부정은 일단은 현실을 긍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현실 의 부정은 현실을 초극하려는 용기이기 때문에 그 출발점에는 근원적인 긍정이 필요하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도덕적 타락을 부정한 것이지 아네테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도덕적 타락이라는 현실을 담 고 있는 아테네는 소크라테스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비록 거기에 부패와 부정과 타락 이 충만해 있다 하더라도, 아테네 자제를 부정하거나 무화 할 수는 없었다. 그의 근원적인 선택은 아테네였고, 아테네에 대한 긍정이 그의 용기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반문이 가능하리라.'아테네 자체를 긍정한 것과'아테네의 현실을 긍정한 것은 다르지 않은가? 이것은 마치 실체와 현상을 구별하려는 방법과 같다. 아테네라는 실체가 따로 있고 아테네의 일시적 현상으로서의 현실은 이와는 다르다고 보는 것이다. 아테네의 실체와 아테네의 현상을 구별하는 것은 적어도 행위에 있어서는 불가능하다. 구체적인 행위의 구체적인 대상인 아테네는 바로 그 현실 외의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조국이 따로 있고 조국의 현실이 따로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조국은 바로 역사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현실 자체다. 그러므로 긍정하려는 현실과 부정하려는 현실이 다르 다고 하는 것은 사변적인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긍정하면서 부정한다는 역설이 성립하고 '긍정이 즉 부정이며, 부정이 즉 긍정이라는 변증법적 원리가 적용된다. 다만 다음과 같은 점을 전제하고 이상에서 한 말을 음미해야 한다. 우리가 부정하려는 현실은 역사적 귀결로서의 현실이다. 그 안에는 과거에서 누적되어온 온갖 것이 현존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긍정하러는 현실은 현존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즉 그것은 시간으로는 현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미래가 포함되어 있다. 현실에 잠재해 있는 가능성을 통해 이미 미래를 선취하고 있는 현실이다. 다시 말하면 부정하려는 것은 현재적 현실이며 긍정하러 는 것은 미래적 현실이다. 소크라테스가 부정한 것은'현재의 아테네'였고 그가 긍정한 것은 현실 속에서는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 도덕적 자각까지도 실현된'현재 속의 미래의 아테네'였다. 만일 현재적 현실, 즉 목전에 실현, 전개되어 있는 현실을 긍정하는데 그친다면 그것은 현실에 대한 순응이나 추종이다. 진정한 현실 긍정은 미래적 현실, 즉 아직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자신의 주체적 결단에 의해 선취된 미래가 가능성으로서 깃들어있는 현실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긍정을 지금까지'근원적 현실 긍정'이라고 표현해 온 것이다.

앞에서 결단은 용기의 모태라고 했다. 결단은 용기의 구체적 내용이며 그 대상은 현실이다. 그러므로 용기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다. 용기에 대한 수많은 이론보다 소크라테스의 구체적인 용기에서 더 많은 감동을 받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결단은 주체적 선택이며 이러한 선택을 통해서 우리는 미래를 선취한다. 우리의 선택은 항상 현재에 있는 것 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이다.

결단 자체는 모험이다. 여기에는 얼마나 정확하고 합리적인 현실 분석이 수행되었는가, 현실이 갖고 있는 가능성은 무엇인가(미래는 공상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토대로 해서만 가능하다),그 가능성을 실현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등 난점이 따른다.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선택은 결국 세계의 선택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엄청난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따라 행동하고, 그 결과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영원히 떠맡을 수밖에 없다. 한국가의 지도자가 선택한 것이 그 국가에 남기는 결과가 얼마나 큰지 생각하면 결단의 무서움을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결단은 진정한 용기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비겁한 자는 결단을 회피할 것이며 만용밖에 모르는 자는 결단하기 전에 행동부터 시작할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모든 성실을 다 기울이었다는 자신, 자신의 선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한다는 신념, 그것이 인류를 위해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는 확신. 용기 없는 자라면 이러한 결단에 도달하기 전에 절망하고 말 것이며 오히려 이러한 결단을 요구하는 현실을 외면하고 현실도피라는 안이한 처세술을 택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용기는 근원적으로 현실을 긍정하는 용기일 것이다. 이러한 용기의 구현을 우리는 소크라테스에게서 본다.

<소크라테스의 변명>─황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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