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요약
학교에서도 아이들은 '교육 서비스를 사는 사람'이라는 위치를 무의식중에 선점하고자 한다.
아이들은 마치 경매에 참가한 부호들처럼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고서는 교단위의 교사를 거만하게 바라본다.
"자. 당신은 뭘 팔건데? 마음에 들면 사주지"
이 말을 교실 용어로 바꾸면 "글자를 배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가 된다.
009 글로벌 자본주의의 펀치를 받은 국민국가의 미래
주식회사의 평균수명은 일본에선 7년 미국에선 5년이다. 그 이상 긴 기간을 염두에 두고 '최적 행동'을 고려하는 것은 기업 활동상 무의미하다.
국민국가는 일단 '수명 100년 이상의 존재'를 기준으로 매사를 판정하고 있다
학교의 설립 목적은 '차세대 국가를 책임질 수 있는 성숙한 시민의 육성' 입니다. 제대로 된 어른을 계속해서 길러내지 않으면 사회는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른을 키운다'는 것은 100년의 안목으로 볼 때는 아주 합리적인 행동이 됩니다.
하지만 글로벌 자본주의는 그런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일단 다음 4분기의 수익을 올리는데 필요한 인재 육성'입니다. 능력 있고, 임금이 낮고, 체력이 있고, 권리의식이 희박하고, 비판정신이 결여되어 상사의 말에 순종하고, 어떠한 공동체에도 귀속되지 않고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아 회사의 전근 명령하나로 곧바로 해외 지점이나 공장에 부임할 수 있는(글로벌 인재) 그런 청년을 대량으로 공급해줄 것을 학교에 요구합니다.
국민국가 내부적인 발상을 하는 교사들은 그런 요구에 강한 위화감을 느낍니다. "그런 아이들만 키울 경우 30년, 50년 후에 어떻게 될까?" 하는 불안을 느낍니다. 제대로 된 가정을 가질 수 있을까?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지역사회를 책임질 일꾼이 될수 있을까? 국민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공공의 복리를 배려할 수 있을까?
(배우지 않는 아이들, 일하지 않는 청년들) 그들은 아마도 자신의 수명을 5년 정도로 설정해서 그것에 기초해서 '학교에 다니는 것의 불합리'와 '노동하는 것의 부조리'를 판단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논리에서는 옳은 판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생물로서의 수명은 5년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지요.
019 공부와 일에서 도피하는 세대와 소통하기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긴 역사적 투쟁의 성과로 힘들게 확보한 시민의 자유를 20세기 선진국 시민들이 헐값에 넘기고 독재정권이나 기계화에 굴복하는 도착적인 현상을 분석한 심리학의 고전으로 통합니다. '공부로부터의 도피'라는 조어는 마찬가지로 앞선 이들이 벌였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싸움의 역사적 성과로 어렵게 획득한 '교육 받을 권리'를 마치 무가치한 것처럼 방기하고 있는 요즘 아이들의 모습을 설명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공부로부터의 도피
025 새로운 유형의 사회 집단이 출현하다
이 '공부로부터 도피하기'는 독립된 현상이 아니라 '노동으로 부터 도피하기'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두 현상은 동일한 사회적 지각변동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032 맞춤법을 모르는 대학생들
(어휘력의 문제) 그것을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결론 지어버리면 이 맥락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학생들은 글을 많이 읽고 있기 때문이다. 만화책이든 여학생들이 즐겨 읽는 패션 잡지든 정보지든 대량의 문자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당연히 '모순' 정도의 한자는 만화책이나 패션 잡지에도 자주 나온다. 그럼에도 모순을 한자로 쓸 수 없다. 왜일까?
035 모르는 게 있어도 개의치 않는 아이들
아마도 그 글자를 건너뛰고 읽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젊은 친구들의 '건너뛰기 능력'은 우리 세대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발달했다.
040 왕자와 공주가 되어가는 아이들
스와 선생은 알고 지내는 교사들과 고민한 결과 '아이들은 등가교환을 하려는 것이 아닐까'라는 가설을 세웠다.
인용구 : 아이들은 자신의 행위에서 자기가 인정하는 마이너스 부분과 교사가 내릴 처분을 '등가교환'으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한다', (중략) 그래서 자신의 공정함을 확보하기 위해 사실 그 자체를 없애든가 가능한 축소하는 길을 선택한다. 이후 학교에서 학생이 일으키는 '사건'의 전개는 이와 비슷한 과정을 밟아간다 <스와 테츠지-왕자과 공주가 되어가는 아이들>
055 교육의 역설
교육의 역설은 당사자가 교육이 제공하는 이익을 교육이 어느정도 진행될 때까지, 경우에 따라서는 교육과정이 끝날 때 까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런데 소비주체로 학교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애당초 그런 역설이 교육을 성립시키는 바탕이 된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렇다면 배움이란 무엇인가. 배움은 아이가 모국어를 습득하는 과정과 같다. 말을 배우는 데 있어서 아이는 ‘이것을 배우면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라고 묻지 않으며 ‘이것을 배우면 내가 어떤 사람이 될까?’를 알지 못한다. 아이는 말을 순수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배운다. (...) 나는 이것이 고등교육 자살의 한 징후라고 생각한다. 학생이 앞으로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대해 미리 알고 있을 것을 전제로 해서는 배움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배움이란 자기가 배운 것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주체를 구축해가는 과정이다. 공부를 끝낼 시점이 되어야 비로소 무엇을 배웠는지를 이해하는 수준에 도달한다. 공부는 이런 역동적인 과정이다. 배우기 전과 후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지 않으면 공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 하지만 이 비합리성 안에 멘토의 교육적 기능이 있다. 지금은 의미를 알수 없는 말이지만 일단은 ‘뭔지 잘 모르는’ 채로 받아들이고, 언젠가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성숙의 단계에 이르게 되기를 희망한다. 이러한 생성 과정에 몸을 던질 수 있는 자만이 배울 수 있는 것이다. P152- 출처: http://blog.jinbo.net/troom/8
059 등가교환의 심리
그들은 그저 '자신의 불쾌함과 등가인 교육 서비스'를 요구할 뿐이다.
062 '불쾌함'이라는 화폐의 기원
아버지가 일하는 모습을 가족들은 볼 기회가 없다.
노골적으로 언짢은 얼굴을 가지고 돌아옴으로써, 자기가 가족을 부양하기위해 부당하고 가혹한 노동에 종사하고 있음을 과시한다.
그저 온몸으로 피로와 불쾌함을 표현함으로써, 아이도 아이 나름대로 주어진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067 배움과 시간
만약 학생들을 교육 소비자로 인정해버리면 교육의 장에서 제공하는 배울거리의 의미와 가치를 결정할 권리가 아이들 손에 맡겨지게 된다.
'시장 원리를 기초로 할 때 배움은 일어나지 않는다.'
071 모국어 학습과 배움의 원리
배움이 시간적인 현상임을 가장 쉽게 설명해주는 사례는 모국어의 습득이다.
말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는 앞으로 무엇을 배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이들은 '언어'라는 개념도, '학습'이라는 개념도, '가치'나 '의미', '유용성' 같은 개념도 모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시점에는 전혀 몰랐을 테니까.
아이들은 학습에서 주권을 가진 자유로운 주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물건을 사는 주체'는 무시간적 존재이다. 물건을 사기 전과 산 뒤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가 된다.
배움이란,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의미나 의의를 측정할 수 있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다 배우고 난 뒤의 배움의 주체는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존재한다.
077 '자기 찾기'라는 이데올로기의 함정
우리 사회는, 사람들이 어떤 행위를 하려고 할 때 행위의 동기가 그 자신안에서 나왔는지, 교육심리학 용어를 빌리면 '얼마나 자발적인 동기에서 출발했는지'에 따라 그 행위의 가치를 매기는 일에 익숙하다. 타산과 이해관계보다는 자발성을 더 존중한다. 돈과 권력, 명성 등과 같은 자기 바깥에 있는 목표를 향해 행동하기보다는 개인의 흥미와 관심에 따른 행위를 더 바람직한 것으로 여긴다. 특히 개성을 존중하는 사회에서는 행동의 지침으로, 자기 안의 깊숙한 곳에 있는 '무엇인가'를 자기 바깥쪽에 있는 기준보다 더 존중한다. <키리야 타케히코-계층화 일본과 교육 위기>
사회적으로 널리 유용하다고 인지된 가치일지라도 '내 입장에서 봐서' 유용성이 확증되지 않으면 미련 없이 버린다. 이렇게 자기중심적으로 가치를 매기는 일이 모든 상황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교육붕괴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081 미래를 헐값에 파는 아이들
'무엇을 위해 공부하나?', '이 지식은 무슨 쓸모가 있나?', 교육개혁과 아이들의 학습 이탈을 둘러싸고 이런 물음들이 자주 등장하는 까닭도 그 배경에 개개인에게 끊임없이 학습의 의미를 묻고 의미 있는 학습만을 찾도록 부추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당초 이런 질문에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해답이 있을 리가 없다. (중략) 재미있다-재미없다, 즐겁다-괴롭다, 당장 도움이 된다-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아이들이 '재미있고 도움이 될 만한' 수업을 원하는 것은, 너무 일찍부터 개개인에게 의미를 찾도록 하는 질문들이 사회에 충만해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현대사상은 왜 배워야 하나요?"
어떤 학술 분야가 배울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결정권은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질문을 통해 밝히고 있다. 나는 이 거만함과 무지에 정말로 감동받았다.
개인적인 판단이 옳기 위해서는 '연대보증인'이 필요하다. 그것은 '미래의 나'이다. '나'에게 자기결정권이 있는 것은 내가 한 결정으로 인해 나중에 불리한 사태에 직면한다 해도 그 책임은 스스로 감수하겠다고 '내'가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 쓸모가 있는가?" 라는 공리주의적 질문을 밑에서 떠받들고 있는 것은 이 '자기결정-자기책임론'이다. 이것 역시 '자기 찾기 이데올로기'와 같은 시기에 민관일체가 되어 주장했던 말이다. 그리고 이 주장이 헐값에 미래를 팔아치우는 아이들을 대량으로 배출하고 있다.
2부 요약 (임시)
- 리스크 사회의 약자들
인간의 고립화는 다양한 병적 형태를 취한다.
'공부로부터의 도피'도 초기 증상의 하나이다.
고립된 아이가 혼자서 학교라는 시스템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자기 가치관을 학교 시스템에 대등한 것으로 대치시킨다.
"이것을 왜 배워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들이댄다. 스스로
배울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지 못하면 아이는 배움을 거부한다.
감상문
좋은 점.
공부를 왜 하기 싫어 할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개인주의, 소비주체에 가깝다면 공부를 안한다.
등가교환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을 왜 하기 싫어 할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의 방향을 얻을 수 있다.
경제적 합리성의 몰락이 원인이다.
양극화 현상을 설명한다. 특히 경제 불황시 자기결정-자기책임 이데올로기에 노출된 개인들은 손실를 사회화 할 수 없어서 나락으로 간다.
자만, 환상에 빠진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다.
교육은 권리이다. 아이들이 배부른 소리를 하는 걸까?
근데 권리라고 하기엔 학교 안가면 애 때리는 부모가 많지 않았나?
과연 아이들이 권리라고 생각이나 하겠는가?
그것보단 합리성에 갇혀 있는 게 아닐까?
빨리빨리에 잊혀진 시간성을 되찾을 수 있다.
뭐든지 빨리 쉽게 얻고자 하는 마음. (성급함)
현대 고령사회의 노인빈곤, 미래 회의 경향.
그로 인한 젊을때 죽는다식의 허무주의적 발상 (무책임-언제 죽을지 모르기에 시간개념이 없음.)
때문에 장기적인걸 못보면 안된다.
나쁜 점.
사회주의, 공산주의적 시각과 결론(노동의 인류학, 노동착취론).
그러나 이런 시각이 없으면 쓰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해결법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저자의 다른 모습들을 보니 민족주의자들 돈 뜯어먹는 것 같다...
마치바의 공동체론을 어른이 없는 사회란 자극적인 제목으로 바꾸어 출판하는
모습이 회의적이다.
노동이 등가교환이 아니라는걸 증명하는데 문제가 있다.
노동이 등가교환이 아니게 된 원인은.
임금지불의 시간차로 인한 착취가 아니라, 과도한 인구 증가로 인한 경쟁 심화가 원인이다.
안락사 말곤 답이 없다.
교육이 무시간 모델이 아니기 때문에 주입식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읽히는데 이는 문제가 있다.
고교-대학 과정이라면 기회비용이 크기 때문에 경제적 기준이 사용될 수 밖에 없다.
갈수록 의무 교육의 난이도는 높아지는데 교육의 효율성은 낮아서(사회적 연대의 축소 및 도덕적인 힘의 약화) 문제다.
직관을 가꾸고. 체념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학습에 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느낀 점.
내가 자만했다. 너무 감정적인 선택만 하고 이성적인 후회를 해왔다.
끝까지 배우기 전까진 함부로 판단하면 안될 것 같다.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만이 볼 수 있는 시야가 있는 것 같다.
청년땐 보고 싶은 글 만 보아선 안된다.
평소 생각하던 파편화된 내용들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됐다.
나의 전제들을 바꾸진 않겠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소비주체, 개인주의, 경제적 합리성을 가져가고 대신에 시간성 개념을 추가 하기 위해 염세주의적 시각을 추가 하겠다. 그러면 체념하는 마음으로 움직일 수 있다.
사회적 이상향 자기주도 자기긍정 학습-개성-자기 찾기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원래부터 부모들은 아이들을 방치하며 키워왔다.
애초에 일하느라 키울 여력이 안되는데도 낳았다. 국내 식량 및 자원 자급자족도 안되면서 낳았다. 그런데 개인주의, 허무주의, 소비주의 영향 때문에 아이들 스스로 성장하기 어려워진 아닐까?
우치다 타츠루 책은 이거 말곤 안 사는걸 추천한다.